말씀 속에서2013. 11. 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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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무관심


해럴드 라스웰(H. D. Lasswell)이라는 정치학자는 사람들의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 무정치적 태도, 정치의 가치를 인정치 않고 오히려 예술·과학 등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편이 정치의 그것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보이는 태도. (2) 탈정치적 태도, 자기의 정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크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과 영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환멸을 느껴 그 정치에서 탈퇴하는 태도. (3) 반정치적 태도, 어떤 종교적·도덕적·사상적인 입장에서 정치에 반대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입장으로서 도리어 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 

그러나 우리나라 경우는 위와 같은 이론으로 분류하기에는 어려운 ‘무관심’에 속할 것이다. 실상은 그 민족성 자체가 그 어느 민족 보다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응결된 상태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관심인 척 숨기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가는 사람을 잃게 되니깐?) 

하지만 성서의 편찬 자체가 정치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예레미야, 애가, 욥기, 열왕기, 역대기뿐 아니라 오경 전체, 그리고 마가, 누가.. 복음서들 외에 서신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정치 상황 아닌 문서는 없다. 다만, 그 편찬자들이 어떠 어떠한 정치색을 띠었다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상황 배후의 하나님을 조명할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오로지 천당과 지옥 얘기만 하는 목사라고 해서 신령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본론 | 예언자인가 정치가인가


(1)


다음은 예레미야가 활동하게 되기까지 배경이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때는 B.C. 627년 경이다. 요시야 왕 제13년에 해당한다(렘 1:2). 그는 상류 사회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곧바로 남 유다까지 압박해 오던 앗시리아가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그 위력이 정점에 다다랐을 무렵이다(유다 왕 므낫세 시대). 


그러나 앗수르의 힘이 급격히 떨어져 연합군이 되어 들이닥친 바벨론과 메대에게 니느웨를 내어줄 정도로 쇠퇴하게 된다(612년쯤). 이와 같은 세계국가의 패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틈타 남 유다의 요시야 왕은 내적으로 야웨 신앙 중심의 개혁을 가하고 밖으로는 북 이스라엘 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느고 II세에게 목숨을 잃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남 유다 왕으로 세워진다. (유대인들이 세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사로잡아가고 여호야김은 느고 II세가 세운 요시야의 다른 아들이다) 609년경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유다는 이집트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4년여가 지난 후 605년경 이집트가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유다는 바벨론 지배체제로 바뀌는 신세가 된다(렘 46:2). 3년 정도 지나 남 유다는 일차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 왕 여호야긴과 지도층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대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앉혀놓는다. 597년경의 일이다.


약 601년 경 유다는 두 번째 반모를 꾀한다. 바벨론이 이집트 원정에서 실패하자 예언자들의 예언 방향도 전환되는 추세를 보였는데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여론이었다. 급기야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의 후원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이집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것과 같이해 이웃 국가와 동맹을 맺어 마침내 바벨론에 반기를 든 것이다(렘 27-28). 바벨론 군대는 589년경 다시 유다로 들어와 예루살렘을 에워쌌고, 587년경 유다는 완전히 망하고 시드기야는 눈알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2)


예레미야는 한 마디로 말해 당시 친 바벨론 정치 노선을 펼친 예언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정치인이었다는 말도 아니고 그에게 특별히 정치적 취향이 남달랐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예언 사역이 전혀 시대를 외면하거나 소외 시키지 않고, 그 시대가 당면한 시대 속에 충실했음을 의미한다.  


(3)

그리스도인이라면 특별히 정치에 관심을 갖는 태도를 지양하는 것이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관심’을 지향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가 관심해야 할 부분이 오직 영적 분별임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런 바른 (영적) 관심에 몰입해 있을 때에 외부에 비치는 우리는 때로는 ‘무관심’ 혹은 특정 ‘정파’로 비칠 뿐이라는 사실 또한 일러준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나 우리는 정치가 아닌 예언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에필로그 |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그토록 유명한 말을 어쩌면 그렇게도 금은보화로 가득 채워준다는 말로만 알고 있었을까? 정말이지 청년기부터 접했던 목사님들께서는(특히 부흥강사님들) 한결 같이 내 입에는 재물이 채워질 것만 같이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이 말은 그 문장 앞뒤를 조금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사실은 그 입에 찬양이 없다고 야단을 치는 말이다. 그리고는 이내 그 입에다가 ‘찬양’을 채우겠다는 말인 것이다. 


집도 성전도 나라도 다 잃은 상태에서 누가 찬양을 하랴?! 찬양 부르라고 강제로 입을 벌리면 아마 인상쓰면서 다 자물통을 채울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본말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상황인 셈이다.




* 2013.9.1일자 |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 시 81:1, 10-16; cf. 렘 2:4-13. (c.f. 히 13:1-8, 15-16; 눅 14:1, 7-14.)

* 이미지 참조: sgilmore215.blogspot.com     crustybreadbl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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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2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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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978년. 테일러 외 두 명의 우주비행사는 깊은 수면에서 깨어나 바다에 불시착했음을 깨닫는다. 불시착한 그곳은 지구와 환경이 비슷하지만 다른 행성이었다. 행성을 탐사하던 테일러 일행은 곧 생명체를 발견하지만(그들은 유인원이다) 말을 타고 총을 쏘는 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행성에선 인간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미개한 종족이며, 유인원만이 언어와 기술을 습득한 진화된 종족이다. 일행 한 명은 총에 맞아 죽고, 테일러와 남은 한 명은 생포되어 유인원의 도시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테일러의 동료는 강제로 뇌수술을 당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고, 테일러는 유인원인 지라 박사 눈에 들어 약간의 지능 있는 특별한 인간 취급을 받는다. 테일러는 이 낯선 유인원 사회에 엄격한 계급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고릴라는 경찰, 군인, 사냥꾼 역할을 하며, 오랑우탄은 행정가, 정치인, 변호사, 마지막으로 침팬지는 지식인 및 과학자 계급이었던 것이다. 고릴라들은 테일러가 유인원 사회의 근간을 파괴하고 혁명을 이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테일러를 죽이려 하지만, 침팬지 지라 박사와 코넬리우스는 테일러의 탈출을 돕는다. 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한 테일러는 결국 고릴라들에게 잡혀 다시 끌려온다. 결국 테일러는 재판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지라와 코넬리우스는 사촌 루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테일러를 유인원 도시 밖의 금지 구역으로 데려간다. 코넬리우스는 금지 구역에서 이전 문명의 유물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 금지 구역에 다다른 테일러는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혹성탈출, 1969. 출처: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bsstory&logNo=50153822024)


이 영화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성역 곧, 신성한 곳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신성한 곳, 거룩한 곳이라는 말은 금지 구역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거룩한 것은 선한 것인데, 그 선(善)이 금지되어 있다?



본론 | 만질 만한 불


히브리서 12장에는 두 종류의 불이 언급된다. “만질 만한 불”과 “소멸하는 불”.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이 있는 곳이 - 아마도 시내산 - 아니라고 말하면서, 지금 있는 곳은 시온산이라 말하고는, 불 역시 소멸하는 불로 대체되었음을 공지한다. 불은 하나님의 메타포로 전자는 만질 만한 불이었지만, 후자는 (만질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라는 것이다. 전에는 만질 수 있던 불이 이제는 만질 수 없는 불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같은 불의 이행을 통해 나타나는 ‘금기’의 관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신성하다.


모세가 장인의 양무리를 칠 당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났다. 그 때 모세가 좀 더 가까이서 보고자 다가섰을 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말한다. 이는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면으로 취급되어왔다. 성서는 이 부분을 하나님과 사람이 대면하는 첫 장면으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말씀하신 상대는 모세뿐 이었다고 성서는 증언한다(출 33:11). 그리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온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고 나면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이러한 권위를 종교 지도자들이 고스란히 받아간다. 과거나 지금이나.


(2) 위험하다.


물론 성서에서 모세 이전에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많다. 그러나 호렙산(시내산)에서 모세와의 대면을 처음으로 꼽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법정적 관계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정적’이라 함은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다짐이 비로소 법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법을 토대로 긍정형 조문 248가지와 부정형 조문 365가지가 구성되는데 그것은 유권해석에 따라 더욱 확장되기에 이른다. 가령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병에서 놓임을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그 상황에서 안식일을 엄수 하지 않은 죄에 묻는 경우가 그 한 예다(눅 13:10-17).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백한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지키느냐에는 많은 변수와 해석이 따랐기 때문이다. 오로지 ‘위험하다’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3) 깨끗하다(더럽다).


‘금기’에 관한 세 번째 개념은 ‘더럽다’(깨끗하다)이다. 오물 만지던 손으로 식사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대인의 결례는 그 더러운 손에서 오물을 씻어내는 데에 근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 담갔다가 건지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강박인 동시에 쾌(快)인 것이다. 예컨대 유대인들의 코셔는 건강/웰빙인가? 종교인가?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강박인가? 모두 같은 것이다.

 


이들 세 가지로써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종교적 영향력은 행사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000여 년 전이었던 히브리서 저자가 이미 그 불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이행시키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소멸하는 불(혹은 강렬한 불)이라는 말은 히브리서 저자의 일종의 워딩으로서 마치 뭔가 더 강한 저주를 내리는 불이라는 표현 같지만 실상은 역설적으로 “만질 만한”에 대조된, “만질 수 없는,” 즉 없다라는 의미로서 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전에 강박으로 압박했던 그 모든 터부들이 이젠 없어져버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소멸하는 불


그 거룩한 성역에 대해 심증을 굳힌 테일러는 목숨걸고 그 금지 구역 진입한다. 거기서 유인원이 지배하는 이 행성이 사실은 인간이 지배했었던 곳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아낸다. 인간과 유인원 지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해변을 따라 걷던 테일러는 그 행성 끝에 다다라 무릎을 꿇고 깊은 탄식과 함께 이런 말을 내뱉는다.

“맙소사, 내가 돌아 왔구나.” 



우리가 만질 만한 불에 관한 강박에 시달리는 한 그것은 다 파괴된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돌로 된 불을 만지게 됨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2장 마지막 절 “소멸하는 불”에 관한 주석이다.



2013.8.25일자 | 히 12:18-29. (c.f. 렘 1:4-10; 시 71:1-6;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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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18.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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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Man at Work (1883)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한 화가로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때에, 경이로울 정도의 농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당시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테오. 내가 그들 가운데서 뭐든 형체가 될 만한 그 뭔가를 그린 풍경을 볼 것 같으면, 난 분명 풍경 화가는 아니야...” 이 그림만 보더라도, 여러 종류의 요소가 풍경 안에 위치되어 있지만 이내 인간의 형상으로서 직결된 이 인물의 손에다 우리 이목을 집중 시키고 있다. 여기서 이 남자와 자연은 함께 녹아내리고 있다. 마치 땅 위에 그들이 함께 심기어진 것처럼. 이러한 강력한 의제는, 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불변하는 역사적 실제였던 것이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이 그림은 헤이그에서의 동시대 화가들과는 전혀 부조화 된 마무리를 지니고 있었다. 대충 대충 먹여진 그 터치의 상스러움, 그리고 거친 표면의 처리는 깔끔한 마무리를 모든 완성의 기치로 여기던 당대 정서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태도였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언제나 이질적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그의 말에 잘 나타난다. "그놈들은(다른 화가들 혹은 일반적 사회 정서를 가리킬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언제나 결론 내리곤 하지...!" 

이런 고흐 자신의 성급한 기질은 이들에 대한 분노를 한 층 더 격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 같은 성격은 그가 감수해야 했던 예술적 한계만큼이나, 사회 구속에 관한 체제 전복적 이미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Josephine Cutts and James Smith, VAN GOGH (Parragon Book, 2001), 24-5.


본론 |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 가지


‘추수감사절’이라는 매년 같은 주제를 어떻게 다르게 설교하지? 라는 고민을 하고 앉아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영적인 타락을 느꼈다. 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여흥을 돋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일반이기 때문이다. 이런 평소답지 않은 유혹을 깨뜨리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는 다음과 같다.


(1) 


금주의 성서일과(Lectionary)는 새 하늘과 새 땅을(사 65:17-25) 추수의 감사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가장 큰 특성은 “내가 건축한 집에서 내가 살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재배한 포도를 내가 먹을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살지 못하고 자기가 재배한 포도를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나? 


있다. 소작인은 그렇다. 자신이 건축한 집인데도 살 수 없으며, 자기가 재배한 작물인데도 그것을 먹을 수 없다. 마치 제3세계 어린이들은 제1, 2세계 어린이가 가지고 놀 장난감을 만드는 노동에 종사하지만 정작 그것을 가지고 놀 수는 없는 이치이다. 


따라서 금주 본문은 감사라는 미명아래 마음껏 여흥에 취해 뛰놀라는 계시가 아니라, 추수를 착취하는 악습을 규탄한다. 특히 이런 악습은 바로 그 뱀이다(25절). 이리와 사자도 변화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지만 오로지 뱀만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끄트머리에 가서 이리와 사자와 뱀으로 마무리 하고 있는 이 본문에서 뱀은 여전히 흙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뱀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인데 왜 뱀은 흙을 먹는가?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던가? (cf. 창 3:14) 이리와 사자는 초식동물이 되는데 왜 뱀은 여전히 창세기 저주 상태에 있는가? 


흙을 먹는 뱀의 습성은 <착취>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사단 곧, 악이라고 하는 것은 막연하게 뿔 달린 모습이 아니라 바로 <착취>인 것이다.


과학주의나 이성주의로 똑똑한 현대인은 사람이 흙이었다는 사실을, 흙이 피부의 원료가 되는 막연한 화학반응 정도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악을 도깨비라고 상상하는 것처럼. 


질료와 형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흙이라는 질료는 화학반응을 하는 어떤 입자가 아니라 바로 ‘노동’이다. 이것이 사람의 형상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2)


교회에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피고용인을 착취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목사가 되기 이전에 한 고용인일 때에 피고용인과의 분쟁으로 노동부 소환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악의적인 경우 어떻게 고용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지도 잘 알고 있지만, 나 자신이 성경대로 이행했는지 다시 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착취가 이루어진다. 사실은 이 본문에서 가장 궁극적 착취의 현장이다.


교회에서 직원이 다쳤는데 단 1퍼센트의 치료비도 지원 않는 목사. (아마도 그는 6-7천의 연봉을 받는다.) 재해 처우에 관한 사회적 수준에도 못 미치는 교회에서 추수감사를 운운한다? 그건 뱀의 근성에 다름 아니다.


이 이사야서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성전)으로 기뻐하라고 했는데, 성서일과가 묶어 놓은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전혀 기쁘신 것 같지가 않다.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으니(21;5-19).


(3)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요즘 읽고 있는 Josephine Cutts의 <반 고흐>가 교차되었다. 그 중에서도 Man at Work (1883).


저자는 이 작품을 해석하기를 “자연과 녹아내리고 있는 남자”라고 하였는데, 그게 아니라 다른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만 고개를 숙이며 탄성을 자아내고 말았다. 고흐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풍경화 화풍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싱그러운 풍경들 일색이었는데(오늘날의 추수감사 축제처럼?), 그 중심에 이 소작인과 같은 인물들을 데려다 꽂고 있는 고흐의 폭로. 구체적으로 이 작품의 경우,


아아... 저 소작인의 허리 아래로 다리 굴곡을 보라.

특히 엉덩이로부터 무릎까지의 쌍스러울 정도의 붓 터치. 

저것은 그냥 굳어버린 ‘목조기계’인 것이다.

그는 멋진 낭만의 자연과 녹아내린 것이 아니라

그의 과업(Work)으로 녹아 땅에 붙박이가 되고 만 도상(圖像)인 것이다.

평생 흙을 갈아야 먹고 살 수 있는-.

그럼에도 땅이 말을 듣지 않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금년 추수감사절은 이 사실을 폭로한다. (폭로와 계시는 같은 말이다.)



(4)


새 하늘과 새 땅은 제1성전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 하늘과 땅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다가 또 새 하늘과 새 땅이 제2 성전에서 열렸다. 그러나 다시 그 하늘과 땅에 갇히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헐어버리신다. 그리고는 이 반복의 현장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의 프쉬케(soul)를 얻으라. 너의 인내로.” (눅 21:19)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인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인내가 프쉬케다)



에필로그 | 이리, 사자, BUT 뱀.


이 추수감사가 잔치인지 폭로인지 그 경계 때문에 이사야서 65:25의 “이리, 사자, 뱀,” 세 맹수/맹독류는 두 가지 번역을 낳는다.  “이리, 사자 AND 뱀”. 다른 하나는 “이리, 사자, But 뱀”. 후자가 뱀을 제외 시키는 번역이며, NRSV가 그렇게 번역하였다. 나는 NRSV를 지지한다.



 * 2013.11.17일자 | 새 하늘과 새 땅에 못 들어가는 한 가지 | 사 65:17-25. (cf. 사 12 or 시 118; 살후 3:6-13; 눅 21: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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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분간’이라는 말은 관찰하고 깨닫는다는 뜻이 있지만(도키마조)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석>하고 어느 정도의 <해석능력>을 가졌는가?


(1) 


가령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라는 말이 “폴루메로스 카이 폴루트로포스 팔라이 호 테오스...토이스 파트라신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라는 희랍어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도저히 주님의 말씀을 접근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언어에서 다른 한 언어로 옮겨지는 것도 해석이다.


(2) 


그런가하면 요한계시록의 666(계13:18)과 같이 숫자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해석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한 때 사람들은 이 666이 뜻하는 바가 상품의 바코드와 일치한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곧 일어난다고 선포하였다. 벌써 25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상품의 바코드는 666이 아닌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3) 


그렇다면 아래 본문의 경우(앞의 것이 계시록과 같은 상징의 형식이었다면 이것은 시편과 같은 예로 엔크립의 강도가 전자보다 더 센 것이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라고 했을 때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주로 아래와 같이 해석하지 아니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뭔가 무미건조한 해석이라고 여겨지는가?


   ① 과거 요셉 시대의 회고다.

   ②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의미하는 교훈이다.

   ③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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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든 그림이든 그 무미건조함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해석행위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은폐된 것을 찾아냄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앞서 (1)항의 해석은 문자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문자를 모르면 백만 천사를 대동하고 살아도 해석할 수 없다. 사전이 없으면 백만 번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이치이다. (2)항의 해석은 그림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숫자를 계산한 것같지만 그것은 그림에 해당한다) 유사한 형식, 반대의 형식을 지각하고 분변하는 감각을 이용해서 해석하는 능력이다. (게슈탈트라고 했던가?) 따라서 감각이 무디면 해석에 곤란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3)항의 해석은 앞의 두 가지 해석 능력에다가 한 가지가 더 요구되는 해석인데 그것은 <이해>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가? 자신을 이해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는가?



에필로그 |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그 본문의 진정한 해석의 키는 이름의 배열에 숨어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본문의 해석을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배열 코드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째서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라고 하거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이라고 하거나,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이라고 하지 않고 유독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오로지 요셉의 베냐민에 관한 애틋한 정서를 반영한다. 어린 베냐민을 살기 등등한 형들 밑에 두고 타향살이 해야 했던 요셉의 연민, 총리가 되어 형들을 대면했을 때 베냐민의 안위 먼저 물었던 베냐민에 대한 그의 연민, 그것은 어머니가 베냐민을 낳자마자 죽었을 때 어린 요셉에게 배태된 끝없는 안쓰러움이었으며 또 그것은 후일 요셉 일가의 호위 속에서 자라나 첫 번째 왕(사울)을 배출할 정도의 유서 깊은 부족으로 생존해 남은 결실로 꽃을 핀다.


이것이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는 순서쌍에 대한 분간 즉, 해석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해석에 다다를 수 있은가? 


문자해석? 숫자해석? 그림해석? 그것은 앞서 주님이 가라사대,“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책망을 상기하는 바, <시대> 즉, 요셉과 베냐민과의 그 애틋한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 기록된 <시대>라는 낱말이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인 이유이기도 하다. 카이로스 곧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수많은 시간 가운데서도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 바로 그것인 셈이다.  


이것이 가장 우월한 궁극적 이해로서 해석 형식, 곧 시간을 타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2013.8.18일자 | 시 80:1-2, 8-19; 눅 12:49-56. (c.f. 사 5:1-7; 히 11:29-12:2,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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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1. 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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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어디든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교회다.” 도발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이 같은 외침이 한국 교회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인가. 27일 일요일 오후 서울 신사동 R호텔에 위치한 나이트클럽. 스피커를 통해 무대에 울려퍼지는 사운드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나 랩의 굉음이 아닌 찬양 소리와 '아멘'이다. 서울 강남권에서 '물' 좋기로 유명한 이 나이트클럽에서 찬양 예배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째다. 예배 인원만 해도 매주 700명에 이른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힘든 '나이트 클럽 예배'를 기획한 주인공은 서울 온누리교회 청년부 '갈렙공동체'. 담당교역자인 김상수 목사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라고 의미를 정리했다. 일반인들이 기존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엄숙하고 폐쇄적인 이미지를 벗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접근하겠다는 얘기다. 갈렙공동체의 '세속' 진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젊은이들의 미팅장소인 스타벅스와 KFC에서의 새벽기도회로 확대됐다. 우리 사회 젊은 세대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적극적으로 다가선다는 전략의 하나다. 온누리교회는 이미 갈렙공동체 외에도 2~3개의 청년 조직이 홍대 앞 클럽과 대학로의 소극장 등을 예배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6.8.10일자 동아일보>

이것은 당시 트렌드로 자리매김하던 이른바 <열린 예배> 형식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형식의 예배로서 한 일간지에서 취재했던 기사의 일부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공동체에서는 성전건축을 아예 지양하고 체육관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성전건축 자체를 아예 체육관 형식으로 짓는 사례도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예배와 성전의 관계를 탈착 가능한 공간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각종 프로그램도 교회(건물로서) 바깥과 호환성 높은 것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요”

 

은도 하나님 것이요 금도 하나님 것이라는 성전 건축을 북돋는 학개서의 이 말씀이 오늘 날도 예전 처럼 들려올까? 왜냐하면 요즘처럼 성전 건축이 사회문제가 되던 때는 없었기 때문이다. 


70년 동안의 포로생활 후 이스라엘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이들의 귀환은 3차에 걸쳐 진행되는데 스룹바벨 지휘 하에 약 5만 명 정도가 들어오는 1차 귀환 프로그램 때에 학개라는 인물도 함께 들어온다.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를 바로 이들이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곧 사마리아가 주도하는 압력에 의한 난관에 부딪쳐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그 적대자들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성전 재건을 지원하라는 명을 받게 되면서 공사는 속개될 수 있었지만, 유다인으로 명명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집과 땅을 먼저 보수했다. 


왜냐하면 어떤 나쁜 뜻에서 그런 게 아니라 포로기 오랜 기간의 방치로 땅도 황폐화 되었고 거주할 집도 없는 상태여서 자신들의 생활 거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활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그 기간이 무려 14-16년 정도나 흘러가버렸던 것이다. 이때에 바로 학개가 나선 것이다.


그는 스가랴와 함께 백성들에게 성전 중건을 선행할 것을 메시지로 선포한다. 은금이 내것이라는 말씀도 이 때에 들려준 예언이다. 학개의 사역은 매우 짧았다. 약 4개월에서 1년 정도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렇지만 그의 메시지의 효력은 약 한 달 이내에 급속히 나타났다. 그 메시지의 3주 만에 백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사가 중단된 이래 B.C. 520년 경 다리오 왕 때에 건축이 재개되었는데, 마침내 B.C. 515년에 성전을 봉헌하게 된다. 이때 중건될 성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성전.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우주(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공간 요소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큰 공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전이바로 전체요 전부요 중심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 전체를 뒤흔든다는 뜻이다.


(2)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는 성전.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라는 사물들을 영토적 의미로서 공간이라고 규정한다면 ‘나라’는 시간으로서 공간이라 규정할 수 있다. 그래야만 그 ‘모든 나라’에는 현재의 나라들뿐 아니라 그동안 열리고 닫혔던 모든 나라를 소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 말로 모든 시간을 뒤흔다는 말이다. 


(3) 영광이 충만한 성전.


역사적 성전들은 여러 모양으로 여러 방식으로 모욕당하고 파괴당하고 방치당해 왔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채워졌던 적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서 뿐이었다. 



에필로그 | 우리의 성전


성서일과(lectionary) 평행 본문 중에 누가복음 20장27-38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 이야기를 다룬다. 이것이 성전 중건을 촉구하는 학개서 본문과 평행하게 놓여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사두개인과의 부활 논쟁이 다름 아닌 성전에서 발생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성전의 자리에서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갖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저지하였지만(학개의 시대처럼) 특별히 여기서 사두개인으로 집약되는 자들은 부활에 대한 독특한 의구심으로 가로막는다. 일곱 남편 있는 여인이 죽으면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 의구심은 어떤 고차원적인 사두개파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질문 같지만 실은 그들의 영성이 생활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영적 귀결을 생활 중심의 부활로 인식하는 우리네 자아상을 대변한다.


따라서 오늘 날 성전의 진정한 준공이 지체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금융의 부재나 미결로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학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텍스트 본질을 떠난 각종 생활 종교로서 행사의 분주함으로 그 준공이 지체되고 저지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요”의 본 말이다. 


예배 드리러 나이트클럽으로 모이라고 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 어디 가 있는지 모르겠다.



2013.11.10일자 설교. | 제목: 조금 있으면 | 학 1:15b-2:9; 눅 20:27-38. (cf. 시 145:1-5, 17-21, or  98; 살후 2: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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