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0. 17.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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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호모보누스와 프란치스코.


1197년 경에 활동하던 호모보누스라는 사람은 이탈리아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번창시켜 사업에서 버는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가족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 제공했다. 그런 까닭에 가족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아침 저녁으로 교회에 나가는 등 신실한 생활을 하였다. 호모보누스라는 이름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며, 그는 죽음도 미사를 드리던 중 맞이했다. 사후 이노센트 III세에 의해 성인에 올려진 그는 사업하는 자의 귀감이며 그래서 그의 심볼은 ‘전대’다. 비슷한 시기 1182년 경 같은 이탈리아 아씨시라는 지역의 프란치스코도 역시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교역을 하러 갔다가 그를 낳았는데 프랑스와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도 “프랑스 인”(프란치스코)이라 지었다. 그는 원래 기사가 되려고 했으나 젊은 날 배회를 했던 것같다. 어떤 이름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곤 하다가 하루는 한센 병 환자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말에서 내려온 그가 가서 돈을 쥐어 주고 평화의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깊은 신앙을 갖게 된 그는 아씨시 부근의 한 교회를 지키는 가난하고 늙은 신부를 보고서 아버지 가게에 있는 값비싼 포목이며 말이며 다 내다 팔아 그 신부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기행에 보다 못한 아버지는 일부 재산을 물려준 상속권을 회수하기 위해 법정에 세우기까지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상속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다 벗고는 그 옷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이후 그는 저 유명한 극단적 청빈의 수도회 프란체스코회의 설립자가 된다.



프린서플 | 우리가 버려야 할 전대.

눅 10:1-11, 16-20 (c.f. 왕하 5:1-14; 시 30; 갈 6:(1-6), 7-16.)


모든 사람이 극단적인 청빈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사람이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프란치스코와 같이 예수님의 길을 좇아 극단적인 실천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건강한 경제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큰 기둥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본문에서 주님이 칠십 인을 세우셨다는 사실이다. 단지 칠십 인(seventy)이지 제자라는 명칭이 없다. 열둘을 세우고 있는 마태복음 보다 훨씬 보편화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꾼이 부족하다. 이 보편적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전대,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며


먼 여행을 갈 때는 배낭은 물론 어느 정도의 여비도 소지하고 떠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모든 것을 금하시고 신발도 갖고 가지 말라 하신다. 이는 무소유의 청빈을 어떤 미덕으로 설파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대나 배낭이 필요 없는 복음 사역의 정석을 이르는 말씀이다. 먹을 것은 유숙하는 집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먹고, 배낭에 무엇을 받아 넣을 일도 없는 것이다. 걸식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꾼’이 되라는 말씀이시다. 마땅히 받아먹을 수 있는 것도 일꾼이라는 전제일 때 가능하다.


(2) 영접하지 아니하면


영접하지 않으면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불친절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복음이 갖는 가치를 이르는 말이다.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든 구차해져서는 안 된다.


(3)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본문은 집에서 집이 아닌 집에서 동네로 이동할 것을 권고한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공동번역)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1) 복음을 통해 뭔가를 사고 담으려는 것에 대한 경계, (2) 복음은 구원의 도구이지만 심판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 끝으로 (3)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 태도에 대한 경계를 들 수 있다.


에필로그 | 프란치스코와 걸식 수도사들.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것처럼 청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요 가치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유행처럼 번져 걸식이 마치 무슨 트렌드처럼 된 때도 있었다. 모든 개념이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본문 가운데 해독하기 가장 어려운 말씀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보를 통해 엘리야와 엘리사를 읽던 누가의 게하시에 대한 경계이다. 가정 방문과 공적 장소를 제외한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사제의 속셈은 무엇인가?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는 병 나아 돌아가는 나아만을 쫓아가 돈을 받아냈다.


이것이 곧 “전대나 배낭을 휴대하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전대나 배낭에 돈이나 물건을 넣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빈 가방(혹은 지갑)을 들고 가는 목적은 단 하나 거기다가 뭘 담아가지고 오려는 심산일 경우이다. 그것이 실제 지갑이든, 마음의 지갑이든. 본문은 이런 걸식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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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0. 1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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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 게시되고 있는 “말씀 속에서” 아티클이 현재 7월분부터 밀려 있는 상태입니다. 7, 8, 9월분을 먼저 올려서 최근 아티클 발행 템포와 맞출까 하다가 우선 최근 것 템포를 맞춰 가면서 7, 8, 9월분을 섞기로 했습니다.



프롤로그 | 우리나라의 나병(한센병).


나병은 구약성서에서 천형으로 묘사되거나 문둥이라는 표현으로 전라/경상도 욕설일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돼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에 강제 수용해 그들의 인권을 짓밟았다. 당시 병원장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선행을 베푼다고 언론에서는 미화되었지만 실제는 강제노역, 여성과 남성의 분리, 불임수술 등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일명 물방이라는 독방에 가두기도 했는데 방 구조가 문턱이 높고 고의로 물을 채워 넣은 구조로 이는 나병환자를 하루라도 빨리 죽이기 위한 고안이었다. 이 물방에 갇힌 나병환자는 겨울이 되면 물방의 얼음이 얼어붙는 바람에 얼어 죽기도 했다. 그 병원장은 살해당하였다.


광복이후에도 비토리섬이라는 곳에서는 토지소유문제로 분쟁이 발생 지역주민에게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그들은 비극의 역사를 걸어왔다. 이들의 처우가 개선된 것은 1965년 당시 소록도국립병원장이 소록도에 거주하는 환자들을 배려, 과수업, 양돈업 등으로 자립을 할 수 있게 하면서부터였다. 축구팀도 만들어 그들이 몸만 불편할 뿐, 정상인보다 못한 게 없음을 보여주었다.


나병은 2000년 경 법률적으로 한센병이라는 명칭으로 공식화된다. 나병과 한센병은 의학적 의미에서는 같으나 사회적 의미에서 다르다. 나병은 치료약이 없어 환자의 형상이 말기까지 진행되던 때의 명칭이라면 한센병은 치료가 되는 병으로서 의미가 있다. 리팜피신 600㎎ 1회 복용이면 3일 이내에 전염성은 없어진다는 사실이 오늘날 한센병 치료의 개가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강력한 항나제를 1980년대 초반부터 환자 전원에게 투여해 오고 있다. (원글: 위키피디아, 한국한센복지협회)


프린서플 | 복음의 가치는 순종인가 자유인가 (2)

본문: 눅 17:11-19. (c.f. 렘 29:1, 4-7; 시 66:1-12; 딤후 2:8-15.)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구절(1-10절)의 내용을 통해 구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 실족: 연자 맷돌/Me ------------->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1-4절)

- 믿음: 뽕나무/Gentile ------------> 바다에 심기우리라. (5-6절)

- 순종: 일하고 돌아온/종 ----------> 식사 수발/무익한 종. (7-10절) 


여기에다가 금주의 본문 11-19절을 같이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감사: 나병환자/Gentile ----------> 돌아온 Gentile/사마리아인. (11-19절)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자는  “나”  입니다.

믿음으로 바다에 심기는 뽕나무는 “이방인” 입니다.

그렇다면,

일하고 돌아와 피곤함을 무릅쓰고 식사 수발을 드는 “무익한 종” 역시 “나” 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으로 돌아온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자세한 내용은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652781511420938)


이와 같이 “나/무익한 종”과 “사마리아인/돌아온 이방인”의 대조됨으로써 실족케 하는 무익한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처럼 될 것인가를 핵심 문제로 던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금주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나병환자, 그 돌아온 나병환자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이 중요합니다.


(1) 멀리 서서(afar off)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가까이 올 수 없어서 입니다. 그 대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자비)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높여 구한 것입니다.


(2) 보시고(saw), 보이라(show).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셨습니다(saw). 그러시더니 제사장에게 하거 ‘너희 몸을’ 보이라(show)고 하셨습니다. 전혀 보여 주지 않으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귀담아 들을 대목입니다.


(3) 가다가(set off)
그랬더니 그들이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닿아서 고침을 받은 게 아니라 가다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출발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지점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set off, 즉 출발하자마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출발하자마자 나은 것입니다.

(4) 돌아와(turned back)
그럼에도 10명 중 1명이 돌아오게 됩니다. 도착지에 거의 도착해서(돌아오기에는 먼 거리라서) 뿔뿔이 헤어졌다면 이해가 갈런지 모르나 출발하자마자 병이 나았는데도 1명만 돌아오고 만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 본심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종의 근성인지 감사의 근성인지.
돌아온 그는 그냥 돌아온 게 아니라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 이 네 단계 과정에서 생각되는 자신의 적용을 이야기 나눠 봅시다.


에필로그 | 오는 것(to come)과 돌아오는 것(turn back).

지난주에 연하여 이번 본문 역시 자유에 관한 본문 입니다. 오늘날 종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Freedom과 Liberty, 즉 똑같은 자유이지만 여기서 형성되는 간극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억압하고 - 기꺼이 억압 받고 - 방종을 합니다. (이 Freedom과 Liberty에 관해서는 다음 아티클을 참조하세요: https://www.facebook.com/MiMoonChurch/notes)


지금까지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사입니다. 

“나”(연자 맷돌)는 바다에 “빠졌다”면 “뽕나무”(이방인)은 바다에 “심기어”집니다.

“나”(무익한 종)은 일하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인 거기다가 나병까지 걸린 이 사람은 “돌아와” 있습니다.


무익한 종에게 사용한 동사는 에이세르코마이,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에게 사용한 동사는 휘포스트레포로서, 후자는 “돌아와” 있는 것에 반해 전자는 아무 힘 안들이고 “들어와”(to come/to enter) 있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은 그냥 언제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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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0. 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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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엘리야의 승천.


엘리사가 벧엘을 지날 때 아이들이 놀리자 저주를 받아 곰에 찢겨 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선지자의 위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진노로 보아야 할까? 이 본문을 들어 현대식 목사가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한 넌센스다.


* 엘리야가 승천하기에 앞서 엘리사가 따르는 장면(왕하 2:1-2, 6-14)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프린서플 | 무엇을 따르는가 어떻게 따르는가.


“따르라”(눅 9:59)고 했을 때, 따르는 데에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따르는 것 즉 따라붙는 것(tag along), 애착으로 따르는 것(be attached to), 목표를 따르는 것(go after),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obey), 행동으로 따르는 것(act on), 법률적으로 따르는 것(abide by/comply), 이들은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낫다거나 더 못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적시 적소에 사용될 때 온전한 ‘따르기’가 될 수 있는 요건들이라 하겠다.



본문에서 엘리야를 따라가는 엘리사 역시 위의 모든 요건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는데도 엘리사는 열심히 따라붙고 있다(tag along). 


(2)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들의 제자들이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라고 만류 하는데도 “너희는 잠잠하라” 하고서 계속 따를 정도로 애착이 있다(be attached to). 


(3) 또한 엘리야가 떠날 때뿐만 아니라 벧엘과 여리고를 지날 때에도 연속해서 “너는 여기에 머물라” 하는 데도 그 목표점을 놓지 않고 따른다(go after). 


(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있게 해달라는)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을 때 시키는 대로(obey)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본다.


(5) 그렇게 엘리야가 승천하고 나자 그는 자기 옷은 둘로 찢어 버리고는 엘리야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들어 엘리야가 앞서 행했던 대로(act on) 물을 쳐서 가른다. 


(6) 아울러 끝으로, 여리고에서는 ‘고치고’ 벧엘에서는 ‘저주를’ 한 일은 상당히 법정적인 것에 따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comply). 여리고는 증언을 했고 벧엘은 조롱을 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예수님의 승천.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마을을 저주하지 않으셨다. 저주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도리어 꾸짖으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따르는’ 태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❶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는 집도, 굴도, 머리 둘 곳도 없으시다고 하셨다(58절).

❷ 예수께서는 죽은 자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다(60절).

❸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62절). 


신약,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 왔을 때 승천이라는 주제는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 줌(SHOW)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 속 승천을 어떻게 잘 승계하고 계승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9장은 그걸 강조하는 것이다.


2013년 6월 30일자 분, 본문, 왕하 2:1-2, 6-14; 눅 9:51-62. (c.f. 시 77:1-2, 11-20 갈 5:1, 13-25.)


이미지 참조:

www.christianhumanist.or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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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0. 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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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세겜, 헤브론과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브라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장막을 친 곳이고 헤브론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다. 세겜과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편입돼 접근이 통제되고 있어 브엘세바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만민의 아버지”가 된다는 위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몇 가지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결정적으로 자녀가 없다는 점 (사실상 자녀의 생산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 둘재 토지가 없다는 점, 셋째 그렇다보니 인접한 외부세력에 한 시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신분(이방인)이라는 문제였다. 우리는 흔히 그가 백세에 아들을 낳는 이야기에만 몰입해있지만,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책무가 주어진 아브라함에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외부 적대 세력과의 지속적인 분쟁이었다. 특히 블레셋 영지가 주 거점이던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과의 끊이지 않는 샘을 둘러싼 분쟁은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그러다 마침내 샘을 하나 확보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브엘세바였던 것이다. 아비멜렉과 협정을 맺어 이를 확보하고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이름 짓기를 “맹세의 우물”(일곱 우물)이라고 지었다. 단순히 적대 세력과의 협정으로서 맹세가 아니라 주거가 안정되지 않았던 자기 공동체에게 안정과 평화를 확보해줄 수 있는 거점이어서였을 것이다. 브엘세바는 아버지 사후에 이삭이 아버지처럼 아비멜렉에게 시달리다가 역시 샘을 재확보한 바로 그곳이다. 또한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준 곳이며,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모셔 갈 때 야곱이 마지막 잠을 잔 곳인가 하면, 일찍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 사막으로 향하면서 잠시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프린서플 | 도상해석. 로뎀나무가 키워드인가 구운 덕이 키워드인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냄으로써 명실상부 대 예언자로 데뷔 한 엘리야가 아합과 바알 사제들에게 도전장을 낸 끝에 예배에 승리를 거두고, 거기서 그치지 않아 계속 밀어부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왕상 18:1-40) 자신이 수 년 간 멈춰 놓았던(왕상 17:1) 비까지 다시 오게 만드는 위력있는 영성을 발휘하지만 이세벨이 다짐한 보복의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도망친다(왕상 19:2).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브엘세바다(3절). 그는 브엘세바에 사환을 두고는 광야로 좀 더 들어갔다. 힘을 보충하려는 의도 보다는 아마 죽으려고 그렇게 더 들어갔던 것 같다. 그곳에 들어간 그는 기진맥진 한 상태로 그늘이 될 만한 로뎀나무를 발견하고는 그 아래서 잠이 든다. 일어나 보니 곁에 구운 떡과 물이 조금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먹고 마신 힘으로 그 지점으로부터 “사십 일”을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영혼은 몇 가지 부분과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 먹(고마시)는 부분 (2) 감각하는 부분 (3) 움직이는 부분 (4) 생각하는 부분


우리는 주로 먹을 것을 위해 움직인다. 감각을 좇아 움직이기도 한다. 먹을 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과 감각을 좇아 움직이는 것은 다 ‘생각’을 통해서 가능하다. 먹는 생각 미감/쾌감 다 ‘생각’이다. 그러나 먹는 것과 그 감각이 완전히 배제된, 생각만을 위한, 생각만에 의한 우리의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도 가장 우월한 단계의 영혼의 부분이다. 그것은 먹는 것과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최고의 부분이다보니, 그곳에는 언제나 먹는 것과 감각이 제거되는 혹독한 경험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 광야는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영혼의 공간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시 42:1-5) 우리 영혼은 그 샘의 원천을 찾아 헤매고 거기서 가장 원초적인 식량, <물>을 만난다. 그 샘, 브엘세바에 다다르는 것이다. 일곱 우물의 장소, 아브라함과 이삭이 맹세한 영적 장소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영혼은 그것 만으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19:4), 완전한 탈진(burn out)의 공간에 들어서고 마는 것이다. 엘리야는 브엘세바를 지나 바로 그 구역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로뎀나무를 만난다.


기왕 광야로 나가 만난 기적이면 더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나야 하는데, 불덩어리들을 만난다. 


모세는 (불에 타지 않는 나무) 떨기나무를, 엘리야는 (불이 까지지 않는 나무) 로뎀나무를- 


에필로그 | 광야에서 왜 구운 떡을 주셨는가.


두 명의 여행자가 로뎀나무 가지들을 연료로 삼아 밥을 지어 먹었는데 1년 후 가보니, 그 재 속에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유대인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숯 재료로 가장 좋은 나무> 곧, <천사가 숯불에 구운 떡을 놓고 간 나무>는 둘 다 같은 나무이다.


이 불을 연료 삼아 엘리야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산 호렙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다. 



2013년6월23일자 본문, 왕상 19:1-4, (5-7), 8-15a (c.f. 시 42 & 43  갈 3:23-29; 눅 8:26-39.)


이미지 참조:

www.wildbike.co.kr.jpg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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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들.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 마다 다 다릅니다. 몇 가지가 다르지만 향유를 머리가 아닌 발에 붓는 것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뿐 입니다. 누가복음이 요한복음 보다 이 발에 붓는 장면에 더 주력합니다. 


* 본 글과 설교음원은 누가복음 위주로 설명합니다.


프린서플 | 향유 부은 여인은 왜 발에 부었는가?

성서일과가 3주째 엘리야 중심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2주 전에는 이방 신 바알 사제와 대치하던 엘리야의 단호함이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바울 시점에 가서는 이방인의 복음을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단호함으로 뒤바뀐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천년 전에 대치하던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자리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은 하나님을 중심선상에 모셨을 때 우리의 ‘변화’ 혹은 ‘변질’이라는 태도가 그것을 갈라낸 것이었습니다.


(참조. http://www.mimoonchurch.com/197 )


지난주에는, 엘리사-수넴 여인(왕하 4:8-37) 이야기와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엘리야-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복원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라는 대 선지자를 그 가정이 만났던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다 변하고 사라져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과 관계된 이야기에 들어섬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3주째 성서일과에 거듭되는 엘리야. 왜 엘리야인가?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던 2인 중 한 사람도 엘리야. 모세는 ‘모세’니까 그렇다 쳐도 많고 많은 예언자 중 왜 하필 엘리야였던가?) 그것은 그가 ‘최고의’ 예언자라서가 아니라 ‘최초의’(The First) 대(大)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저자 누가가 특별히 그곳을 나인 성이라고 밝힌 것은 엘리사를 회고하는 듯 보이지만(그곳이 수넴과 가깝기에), 궁극적으로는 엘리야를 겨냥합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을 돌려주듯 “돌려준다”고 회고 했습니다[눅 7:15].) 즉, 그 분은 바로 ‘대 예언자’라는 것입니다(7:16).


오늘 본문 역시 한 여인이 그리스도께 향유를 붓는 이야기를 통해 ‘대 예언자’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합니다. 마가복음(14:3-9)을 참조하고 있는 마태는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를 베다니의 나병환자 집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한 바리새인의 집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 향유 붓는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도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 혹은 ‘어떤 사람’인 반면 누가복음은 그 집 주인(바리새인)으로서 시몬입니다(다른 복음서는 나병환자인 시몬). 같은 사건도 저자마다 약간씩 편차있게 기록하게 마련이지만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은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처럼 그리스도를 ‘대 예언자’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인 성 과부 이야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떻게 대 예언자 상을 보여주셨는가를 기록했다면, 오늘 본문인 향유를 붓는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는 어떻게 이 마지막(The Last) 대 예언자를 ‘대접’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어떻게?


(1) 그 발 곁에 서다.


(2) 눈물로 그 발을 적시다. /머리털로 닦다.


(3)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다.



에필로그 | 그리스도에게 기름 붓는 자의 자격.


유대인에게 손과 발을 닦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식입니다. 식사 교제 특히 잔치의 경우 그러한 의식으로 환대가 표명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밥을 함께 먹을 수 없는 부류들과의 선을 긋는 것 또한 씻는 행위였습니다. 즉 환대의 표시이자 결별의 표시인 셈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발에 향유 부은 여인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죄 지은 여자’로 지목하고, 또 비난하는 자 역시 “선지자라면서 죄 지은 여자가 자신을 만지게 두었다”라며 비난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은 자의 정체성 내지는 자격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대 예언자나 군주들이 하는 식으로 유력한 인물에게서 기름부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죄인에게 기름부음 받는 분이시라는 역설인 것입니다. 게다가 기름부음은 머리에 받게 마련인데 발에 부어졌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역설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 기름부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죄인’뿐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겠습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닌 자는 이 특권을 누릴 길이 없습니다.

 

2013.6.16일자. 본문: 눅 7:36-8:3, (c.f. 왕상 21:1-10, (11-14), 15-21a; 시 5:1-8; 갈 2:15-21.).


이미지 참조.

http://theepottershand.com/tag/oil-on-my-head/
http://jamestab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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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