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4. 2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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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것을 제거하고 물질만을 토대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 공산주의(communism)라면, 자본주의(capitalism) 중에 더러는 영을 물질로 바꿔치기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둘다 물질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같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 영혼이 잘되는 것이지, 영혼이 잘 됨같이 어떻게 범사에 부자가 된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유토피아는 물질로 물질을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이 양자와 전혀 다르다. 
이를테면, “분노”, “폭력”, “배신”,..., “죽음”, 

물질이 산출해낸 그 모든 플롯(plot)을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당하고 통과해 뚫고 지나간 것, 이것이 바로 물질로 물질을 깨뜨리는 방식, 즉 그의 영광이 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그의 유토피아가 임했다.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서 뛰쳐 나간 직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요 13:31)고 말한 그 알 수 없는 의미도 이로써 이해될 수 있다.   


프롤로그 | 공산주의의 태동.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막스는 1818년 프로이센 왕국에서(지금의 독일)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유대계였지만 복음주의 국교회로 개종한다. 칼 역시 6세 때에 세례를 받았며 청년기까지만 해도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봉사와 희생의 의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35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그리스어, 로마 신화, 미술사 같은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는데 암흑기를 사는 대학가가 대개 그렇듯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운동권 학생이었던 것같다. 행동주의자들이 포함된 시인 클럽에도 출입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검거되거나 추방 당할 때 그는 1년 후 법률과 철학을 공부하러 베를린으로 떠난다. 이때 마르크스는 당시 베를린대(大)를 휩쓸던 헤겔철학과 만난다. 처음엔 괴리감을 느꼈으나 베를린 혁명문화에서 헤겔의 비중은 압도적인 것이었기에 그는 관련 학회 클럽에도 가입한다. 

이 클럽의 핵심인물이 바로 젊은 신학강사 브루노 바우어였다. 바우어는 근대 신학 예수 연구에 있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학풍을 연 학자로 소개되는 인물이다. 그는 복음서가 어떤 실제적인 역사의 기록물이라기 보다는 감성적 필요와 기대감에 따른 기록이며, 예수 또한 역사적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도발적 가설을 전개시켰다. 칼 막스는 예언자 이사야에 대한 바우어 강좌를 수강했다. 여기서 바우어는 새로운 사회적 파국, 즉 예수의 재림시에 닥칠 시련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이 청년 헤겔 학파가 급속도로 무신론화 되면서 칼 막스는 정치적 행동들을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프린서플 | 유토피아가 임하는 방식.

칼 막스를 경도시켰던 헤겔의 역사 인식이란, 역사 자체를 절대자로 놓고 그것은 모순과 부딪쳐가며 ‘발전’해나가는 양식일 뿐이지, 어떤 목적을 가진 신이 곧 역사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의 토대가 될 변증법적 유물론을 착안한 칼 막스는 모든 정신적인 것을 속임수로 간주해 부정하고 오직 물질을 토대로 된 세상을 다시 건설하려 했습니다. 영적인 모든 것을 일종의 환각으로 여기면서까지 그가 추구하고 건설하려던 세상은 한 마디로 철저하게 지상낙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나라는 지상낙원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이었으며 그가 어떻게 물질세계를 뚫고 나가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사람이 예배드리러 도착했을 때.

요한복음에는 ‘예배’라는 말이 11회 나옵니다. 예배의 장소를 지목할 때 두 번(요 4:20[2]), 예배의 시간을 지목할 때에 두 번(4:21, 23), 알거나 모르고 드리는 예배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즉 예배의 질에 대한 표현으로서 세 번(4:22[2], 24),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두 번(4:23, 24)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고침 받고 믿음을 받아들이는 경의의 표현에서 한 번(9:38), 그리고 끝으로 나머지 하나는(12:20) 유월절에 예배드리러 온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왔다는 것인지 예수께 왔다는 것인지 모호하게 된 문장 속에서 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후 예수께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v. 23)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감안할 때 이들의 도착해 예배하려던 대상은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도착했을 때, 바로 그 때 예수께서 영광 얻는 때가 도래합니다.


사람이 떠났을 때.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가 (배신을 하러) 떠간 후에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앞으로 있을 십자가 형을 염두에 둔 표현인 줄 알고 개의치 않고 읽지만 “지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배신을 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나가버려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떠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 계실 때.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당도했다가 다시 모두 다 떠나게 되면, 남는 것은 자신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인자가 들리는 것을 말하며 들리는 것은 십자가 형을 말하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홀로 감당하심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 유물론의 천적.

칼 막스는 철저하게 정신적인 것을 제거하고 물질로만 된 유토피아를 건설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물질에 반한 것이라며 영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은 영적인 것이되 철저하게 물질로 가격한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지상낙원의 폭력은 이같이 물질을 물질로 부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 거짓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물론의 천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미지 참조: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3/jan/25/karl-marx-relevant-21st-century
http://en.wikipedia.org/wiki/Judas_Iscar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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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4. 2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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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미로와 사이렌.


미로(迷路)란 출발 지점에서 도착 지점까지 아주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는 길을 말한다. 방향성을 알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전혀 출구로 향하는 갈림길이 없이 닫힌 길들의 연결을 미궁(迷宮)이라고도 부른다. 장소 이동을 하는 동물이 길을 찾지 못할 때는 그 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유사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불안과 압박을 받는 이유도 그 유사한 공간 형식이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미노타우르스라는 괴물 아들을 얻은 크레타 크노소스의 미노스 왕이 그를 가둬놓으려고 미로를 만들었다. 그 길을 영원히 찾을 수 없도록 설계 도면까지 태웠다. 호머의 오디세우스는 그의 삶과 모험 자체가 미로다. 종착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쉽사리 집에 돌아갈 수 없는 미로다.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으로 잡입했던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뭉치를 풀며 들어갔다가 그 실을 따라 다시 나올 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이라는 미궁에 직면해서는 부하들의 귀를 밀납으로 막고 자신의 몸은 돛에 묶음으로써 그곳을 빠져나온다. 실타래를 풀었다 다시 따라나가는 방식에서는 자기가 왔던 길로 되돌아감으로써 유사함을 갈라내는 일관성을 본다. 귀를 밀납으로 막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당시 자기들 마음과 유사했던 “내 노래를 들으면 너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사이렌 소리를 듣지 않음으로써 일관성을 보존했다. 그런데 오디세우는 왜 귀를 막지 않은 것일까? 부하들은 귀를 막게 하고 자기는 왜 귀는 열어둔채 몸만 묶은 것일까?



프린서플 | 미로를 빠져나오는 방법.


일찍이 플라톤은 사람처럼 이성을 가진 동물은 밖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이 있고 그보다 열등한 동물들은 안을 향하는 성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 근·현대를 살던 종교학자 엘리아대는 사람이 지향점을 안쪽에 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양자는 어딘가를 향하여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정지되어 있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있다는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게도 하고 압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딘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성령을 지도로 주셨습니다. 부활 이후(post Resurrection)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누가의 행전은 그 방향성을 이렇게 놓고 있습니다.


밖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방언을 말하게 되는 과정에 타향 각처에서 와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그 소리를 듣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밖에 나가 설교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가입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코이노니아로 더 많은 사람을 흡수하고 일곱을 위시한 차세대 지도자를 세웁니다. 그 중의 하나인 스데반이 순교를 하긴 했지만 그 여파로 그리스도인들이 각지로 퍼져나가는 결과가 도래합니다. 율법적 전통에 뛰어나고 국제 감각을 가진 바울도 영입되는 결실이 있었습니다.  


안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어려운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주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핍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같은 입장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들이 출현하면서 그 구심축을 지키기에 여념 없었습니다. 아예 유대교 전통을 모조리 무시하자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유대교 전통은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추가로 (부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향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그와 같은 원심축과 구심축 사이에는 큰 동선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선행과 구제였습니다. 초대교회의 기치 자체가 코이노니아(나눔)였으며 바나바도 자기의 모든 자원을 그런 데 내놓은 사람이었으며, 다비다라는 과부 도르가도 선행과 구제에 매진 하던 여성이며, 도르가 이야기 이후 등장하는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는지만 같은 덕목의 실천으로 예루살렘 사도와 연결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갖는 방향성의 실체이며 초대교회가 출구를 향해 미로를 헤쳐나갈 수 있는 실타래이기도 했습니다.    


에필로그 | 침묵의 소리.


부하들과 달리 오디세우스가 몸을 묶고 귀를 막았던 것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 입니다. 이성이 부족한 자는 귀만 틀어막으면, 틀어막았다는 그 믿음 하나로 삶이 속개되는지 모르겠지만 이성을 지닌 오디세우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고, 그리고 그것에 격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몸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sirens-smartermeters.blogspot.com
traumwerk.stanford.edu
www.geometricvisio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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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4. 18.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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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다윈식 진화론.

진화론, 즉 생물로서의 한 종(種)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것이 지닌 본성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새로운 종으로 생겨날 수도 있다는 이 생물학적 이론은 각각의 종이 개별되게 창조되었다는 당시의 견해를 전복시킴으로써 서구 사회를 강타했다. 생물의 종에 관한 이같은 시각은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우선 큰 파장을 가져왔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서 시작된 존재의 본질을 묻는 서구의 철학적 전제의 틀을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행동 양식의 변화를 고하게 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어떤 목적론이나 인과율을 파괴할 수 있는 확실한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주로 그리스도교 세계관으로 형성되어온 서구 사조가 진화론에 가격 당한 폐해는 종교적 문제 같지만 실상은 사회·문화적으로 더 큰 폐해를 가져온 것이다. 변이, 생식, 유전 따위의 생물학적 범주에 불과한 요소들에 도태, 적자생존, 용불용 등과 같은 형식적 추론이 장착됨으로써 그것은 어떤 특수 인종들의 행위가 갖는 정당성 내지는, 그들의 강령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효시로 꼽히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렇게 생물 전반에 걸친 박물학 교본 정도에 그칠 수도 있었으나 그 논조를 휘감고 있는 궁극적 전개가 인류를 겨누다 보니 인종 문제에 적용될 때 그것은 서슴없이 강자의 정당성 교본으로 탈바꿈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진화와 도태, 그리고 거기서 도출된 적자생존이라는 이론은 별다른 저항없이 일종의 사회 법칙으로 규정되어 노예인종과는 다른 주인인종이라는 파시스트 개념에 길을 터주었다. 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진화론에 적대적인 그리스도교에 조차 이 개념이 침범해 있다는 사실이다.

프린서플 | 도태와 생존.

진화론에 맹공을 퍼부었던 그리스도교가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씀을 근거로 약육강식을 정당화 한 환경파괴에 신학을 접목하였는가 하면, 약소 민족을 향해서는 식민지 사관적 선교신학을 펼쳤고,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성공주의에 편승한 번영신학 따위를 설파함으로써 물량적 부흥에만 몰입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해 합법성을 부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진화론이 갖는 논제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맞다 틀리다라는 시대착오적 논거 보다는 그 이론이 당대 사회, 문화, 종교에 걸쳐 어떻게 부당한 정당성으로 오용되었는가에 대한 반성에 있다 할 것입니다.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느니(변이), 기린의 목이 높이 있는 먹이감 때문에 늘어났다느니(용불용) 하는 구시대적 이론과 약육강식 따위의 정당성에(적자생존) 부역 당했던 전력만 제외한다면 진화 자체는 변화라는 측면에서 아주 낯선 법칙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그야말로 도태 속에서 생존한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변화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변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르실 때 하던 일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따랐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 하던 일, 곧 직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례를 더 쳐준다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과업으로의 요청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천국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마 10:4-15) 세례를 베풀기도 하는 변화를 전개해나갔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또 변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또 한번 변합니다. 예수께서 어디를 가든 따를 것이라고 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발견한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또 다시 변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달리시기 전에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여러 차례의 힌트를 주었는데도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찾으러 다닌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때 다시 한번의 변화를 받습니다.

프롤로그 | 그리스도교식 적자생존.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서 보면 그리스도 자신이나, 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나 모두 생존에 적합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삶에 영민한 종(種)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적자생존의 생태계 속에서 언제나 죽음을 배우고, 매맞는 것을 배우고, 손해보는 것만 배우는 종이 과연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생물학적인 변이, 생식, 유전의 진화 관점에서는 이해 불가이지만, 전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은 진화라고 했을 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참조: 

popsci.com.
wolfevolution.web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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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3. 3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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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The Easter

부활절(Easter)이란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교 양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3세기까지만 해도 πάσχα(유월절: c.f. 고전 5:7; 행 12:4; 눅 2:41)로 불리며 기념되던 것이 A.D. 325 니케아 회의 때 명칭과 기일(춘분 뒤 만월 직후 일요일)의 표준화를 손보면서 융합된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이 절기에 “붉게 물들인 달걀,” “산 꼭대기 새 불” 등 지나친 이교 양식의 유입을 초래한 까닭에 이미 주교들에 의해 금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혹자는 부활절 달걀을 알에서 부화된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Easter), 풍작 여신 케레스(Ceres), 박카스/디오니시아카뿐 아니라 힌두식 창조 알과 관련짓는가 하면, 앵글로 색슨족 여신 Eostre(Estre, Estara, Eastre, Ostara)와 연결해 북유럽, 바빌론을 돌아 창세기 니므롯과 그의 아내로 기원을 파내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사순절 역시 탐무즈(Tammuz) 부활신화 한 대목으로 간주해 그의 어머니 이쉬타르(Ishtar)와 바빌론인들이 40일 금식 동안 신이 지하세계에서 나와 자신에게 매질함으로 봄을 오게 했다는 풍습과 연관짓기도 한다. 이집트 오시리스 관련 40일 금식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런 근거로 달걀은 물론, Easter라는 명칭, 사순절 모두를 아예 인정 않는 개혁주의도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개혁이라는 거대 혁신 과정을 거치고도 해체될 수 없었던 역사가 갖는 특유의 유기체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제거하고 어디부터 어디까지는 존속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아무도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실체를 형성하는 질료란 그렇게 도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닌바, 이 시대 우리가 관심할 최선의 부활 테마는 토템에 매립된 지나친 이교 양식도 양식이지만, 창조, 번영, 죽음, 부활에 이르는 그 모든 개념사가 자기식으로 발명되고 고안된 것이라고만 믿는, 교리라기 보단 일종의 강박에 가까운 터부에 관한 재고다. 



프린서플 | 파스카

부활은 다음과 같이 ‘알’로 표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기원의 연쇄 선상에서 유일한 실체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1) 흑암을 빛으로 가르셨습니다. 어둠에는 틈이 없습니다. 어둠은 쪼갤 수도 가를 수도 분리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 어둠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오직 빛으로만 그 틈을 벌릴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흑암을 가르시고 아랫물이라는 감실(龕室; tabernacle)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알에 관한 그 첫 번째 기표입니다. (2) 에덴동산을 구별하셨습니다. 창세기의 환경 조성은 그와 같이 갈라짐과 드러남의 역사입니다. 빛의 공간이 흑암을 가르고 드러났던 것처럼 에덴동산도 그 주변과 구별된 공간으로서의 감실입니다. (3) 홍수를 방주로 갈라내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하셨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탔던 방주 역시 구별된 공간 입니다. (법궤와 방주는 둘 다 Ark라 번역하기도) 물로 가득찬 흑암으로부터 빛의 공간이 구별되었듯이, 황량한 대지로부터 에덴동산이 구별되었듯이, 물을 가르는 방주 또한 그 알의 기표인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 시대 우상 신들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구별과 분리는  그가 가진 믿음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우상들 틈에서 떠나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이것이 또한 알의 기표인 셈입니다. (5)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애굽 땅의 장자를 치는 저주로부터 구별되게 만든 문설주 양의 피, 그리고 홍해를 갈라 그 물을 건너게 하심은 유월절 곧 파스카의 핵심 유래이며 이 역시 알이라는 기호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6) 예수님께서 죽음을 가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는 초대교회 설립자들이 고안한 교리가 아닙니다. 바로 이 파스카 메타포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뜻을 찾아내게 되었고, 그 궁극적 감실(알)의 실체가 바로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집약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부활의 핵심은 넘어가는 데(passover) 있습니다. 죽기전에 환산하고 계산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철저한 죽음 저 너머에 있습니다. 온전한 죽음이 완성될 때, 다 넘어간 후에,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죽음-부활 공식을 미리 계산해 놓고 울부짖다 어느새 뛰노는 것은 파스카일 수 없습니다.


에필로그 | 고안이나 발명이 아닌 계시

성서를 놓고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이교적 식양이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연구 방식은 100여년도 넘은 것입니다. 실제 그런 흔적이 더러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다원적이어서가 아니라, 위와 같은 역사의 연쇄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다원적 우상으로부터 가르고 구별하여 오직 예수라는 진리에 비율을 맞추는 제과정 속에 남은 잔재라 하겠습니다. C.S. Lewis는 이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죽었다 다시 살아나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는 신에 대한 (어떤 이방 종교에든지 퍼져 있는) 이야기를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을 통해 주셨다.”

우리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한 분 하나님의 실체를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부활을 찬양합니다.



이미지 참조:

naldzgraphics.net 
www.99wallpap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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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3. 2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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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문장을 마치 성도들이 가진 재물을 과감하게 청구도 하고, 맘대로 가져다도 쓸 수 있게 하는 구절로 가르치거나, 심지어는 그런 내용과 제목으로 평신도가 쓴 일개 간증책을 단체로 구입해 교회 프로그램에 접목하는 걸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초대교회 설립자는 메시야가 볼품 없는 나귀 새끼 타고 입성한 일에 대해 해명해야만 했다. (1) 마가는 그것이 예언에 따른 것임을 그 나귀 새끼 주인의 반응을 통해서 입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누가도 그러했다. 그러나 (2) 마태는 별 저항없는 그 주인의 반응보다는 예언의 인용 자체, 문헌적 자료 자체로 입증하려 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대신 인용이 보다 명확하게 들어있다.) 


(3) 요한은 이런 어떤 일화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그 어린 나귀를 탄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지목하면서 이 얘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뒤늦은 반성의 깨달음 속에 들어 있다. 특별히 야유하는 군중으로 돌변할 이들은 죽은 나사로의 소생 사건과 중요한 관계를 맺는다. 예수님이 시행한 일곱 개 표적 가운데 마지막인 나사로의 소생을 11장에서 마치고, 예수님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가 본격적으로 드리우는 12장은 그 나사로와의 관계 속에서 이어 펼쳐진다. 즉 나사로의 장례와 예수님의 장례는 하나로서, 표적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싸인이었던 썩은 나사로를 살리는, 바로 그것 때문에 그분이 죽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요한의 시각이며, 그때 그들이 흔든 나뭇가지가 <종려나무>였다는 사실도 요한이 밝혀낸다.


즉, <종려나무>는 <나드 한근>과 마찬가지로 부지불식간에 드려진 장례 예식/절차 중 하나였던 셈이다. 


초대 이후 중세를 지나면서 이 <종려주일>이 꽃의 날(Dominica Florum)도 되었다가 고난주일(Dominica Passionis)도 되었다가 오락가락 하는 건 여전한 회중의 이중성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장례식 문구를 <돈 버는 환금 장치>로 전락 시킨 것은 지난 이천년 이 도상에 대한 주석 가운데 최악의 풀이일 것이다. 

프롤로그 | 고난주간

*월요일부터는 고난주간입니다. 아래 일과에 맞추어     반드시 [기도→읽기→묵상(적용)→기도]를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일자/시간

첫 번째

시편

두 번째

복음서

3월25일 (월)

사 42:1-9

시 36:5-11

히 9:11-15

요 12:1-11

3월26일 (화)

사 49:1-7

시 71:1-14

고전 1:18-31

요 12: 20-36

3월27일 (수)

사 50:4-9a

시 70

히 12:1-3

요 13: 21-32

3월28일 (목) 세족

출 12:1-4, (5-10), 11-14

시 116:1-2, 12-19

고전 11:23-26

요 13: 1-17, 31b-35

3월29일 성금요일

사 52:13-53:12

시 22

히 10:16-25 or 히 4:14-16, 5: 7-9

요 18:1-19: 42

3월30일 성토요일

욥 14:1-14 or 애 3:1-9, 19-24

시 31:1-4, 15-16

벧전 4:1-8

마 27:57-66 or 요 19:38-42

3월31일 부활 새벽

출 14:10-31, 15:20-21

시 114

롬 6:3-11

눅 24:1-12

부활절

행 10:34-43 or

사 65:17-25

시 118:1-2, 14-24

고전 15:19-26 or

행 10:34-43

요 20:1-18 or

눅 24: 1-12


프린서플 | 경사와 애사

오늘은 종려주일(the Palm Sunday)입니다.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인 종려주일은 환영을 뜻하는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 꽃의 날(Dominica Florum)로 불리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을 낭독하는 고난의 주일(Dominica Passionis)로도 불리웠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최상의 환호를 보내던 무리의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이중성을 반영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닌 종교적 이중성이기도 합니다. 이 날에 대한 네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은 그 강조점이 약간씩 다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마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모든 복음서 기자의 공통점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간직했던 것은 이것이 저명한 예언자의 메시야 예언 일부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저자 마가는 예수께서 마을에 있는 나귀를 미리 예지하셨고 그것을 가져오게 하되 그 주인이 막아설 경우 어떻게 말하면 되는 지까지 일러주시는 그분의 권위와 능력을 통해 이 예언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이 복음서에서는 무리들이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연호합니다. (막 11:1-11)


마태.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간략하게 보고하고 있는 이 예언을 명확하게 인용까지 함으로써(슥 9:9) 보다 명확하게 그 예언의 성취를 표명합니다. 그러나 무리의 연호에는 마가와 달리 “나라”라는 말 대신 “자손”이라는 말로 채워집니다. (마 21:1-11)


누가.

마태복음에서는 그 나귀 새끼 주인의 반응을 생략하는 대신 예언의 인용 자체로 증언하고 있지만 누가는 마가와 마찬가지로 인용구 보다는 나귀 새끼 주인의 반응을 통해 이 사건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마가와 마태와 다르게 “나라”, “자손”이 아닌 “하늘”과 “지극히 높은 곳”을 연호합니다. (눅 19:28-40) 


요한.

요한은 그 분의 입성을 “왕”의 입성으로 연호합니다. 특별히 요한은 그들의 무리가 나사로 살리는 장면을 본 사람들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요 12:12-16)


에필로그 | 애사

사순절, 종려주일,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바로 그 후대 후예들의 ‘적용’입니다. 이 동일 기념 주기에 대한 진술과 해석이 다 다른 것은 마가, 마태, 누가, 요한으로 대변되는 그 개인과 공동체의 적용이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네 저자의 표현과 진술이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면 그들은(또는 그들의 교회는) 주님의 부활 이후에 아무런 적용도 하지 않았다는, 다른 말로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뻔하였습니다. 그들 각자의 바른 적용이 올바른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지 참조:

http://www.aslanscountry.com/2011/04/honoring-the-king-a-narnian-look-at-palm-sunday/

www.timeandd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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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