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o'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11.04 자신의 EGO를 좀 먹는 영
  2. 2013.02.25 EGO를 통해 ECO로
  3. 2012.07.02 Ego Vs. Eco
말씀 속에서2013. 11. 4.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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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소개했던(지난 2/25과 2012/07/02 )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GO는 ‘자부심/자존감’이라는 뜻에서 ‘자아’라는 심리적 의미까지 폭넓게 쓰입니다.

ECO는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집’이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실 ‘이기주의’(EGO)를 지양하고 조화로운 환경(ECO)을 지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성서는 여전히 자아를 통해서 환경에 이르는 전통을 진리로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파워 블로거가 날이면 날마다 ‘신사참배’와 ‘독재’ 청산만 외쳐대는 걸 보고서 “그럼 다니엘과 예레미야도 친일파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은 “네 친일파입니다.” 이 답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호로 자식을 봤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그를 기억에서 꺼 버렸다.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 이런 어휘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 민족이 지닌 기본 EGO의 혈액까지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드는 바람에 마치 내가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를 찬양하는 자처럼 만들어버리는 EGO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본다. (단 7:1-3, 15-18)



다니엘은 소년기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왕이 여러 차례 바뀌도록 압제자 나라의 중요 관직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다니엘서는 그의 꿈과 환상 그리고 그 해몽을 통해 그가 하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당대 박수들과는 달리 정보를 활용할 줄 알았다. 오늘 날의 엘벤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정도 될까? 그는 자기가 살던 시대를 중심으로 수백 년의 세계 정치·경제·행정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주로 그가 섬긴 왕들과 정권의 카운슬링을 담당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의 자아를 통해 인식되고 나타났다. 즉,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내다봤던 것이다. 

특히 인자(人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자아가 그를 통해 인식되었다.



(2) 그리스도는 자아(EGO)를 통해 성령(ECO)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아로서 이 땅에서 충실한 자신의 생애를 사시고, 이어서 그의 제2 자아로서 성령을 보내셨다. 포스트 보.혜.사. 즉, “또 다른 보혜사”란 그 뜻이다. 이미 자신의 EGO는 보혜사인 것이다. (둘째 아담, 다윗의 자손, 새 모세, 人子.., 다 그의 EGO에 관한 다른 말들이다.)



(3) 바울은 성령 받은 자아(EGO)를 통해 교회(ECO)를 설립해나갔다. (엡 1:11-23)



바울의 자아는 확실하게 성령 받은 사실을 인식한다. 성령 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방언으로 아나? 통역과 예언으로 아나? 느낌(feeling)으로 아나? 무엇으로 그것을 아나? 교회라는 ECO를 통해서만 <성령 받은 나의 EGO>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박수나 무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니엘처럼.



(4) 복과 화(ECO)는 자아(EGO)를 통해 임한다. (눅 6:20-26)



금주의 성서일과표(Lectionary) 마지막 성구는 두 개의 ECO(환경)을 제시한다. 복과 화. 전자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의 EGO를 지닌 사람들이 들어가고, 후자는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의 EGO가 들어가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친일, 신사참배, 독재, 이것들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김준곤의 CCC도 군사정권 부역의 산물로 부정하는 역사인식의 동향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EGO를 측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지닌 EGO의 모든 혈액을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들던 사람들이 금번 WCC에 가서는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면서 변증하는 모습을 보고서 뿜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비록 환관이었지만 - 그가 자신의 EGO를 살리려고 환관이 되었는지 민족의 EGO를 생존시키기 위해 환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자신의 후세들이 마음껏 배타적 제2성전 시대를 향유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은 자신의 꿈과 함께 그렇게 스러져 갔다.


훗날 이 배타적 제2 성전 시대 주도자들은 ‘사마리아’라고 하는 거대한 열등감을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끼리 칭찬하고 자기들끼리 칭찬 받는 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스도라는 종말은 바벨론이나 페르샤에 떨어진 게 아니라 사마리아 바로 옆 동네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열등감은 EGO의 아름다움을 좀먹는다.

허영은 EGO의 아름다움을 부패시킨다.


2013.11.3일자, 제목: 계시의 영을 주사 | 엡 1:11-23; 눅 6:20-26. (cf. 단 7:1-3, 15-18; 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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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2. 25.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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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EGO & ECO.

위 일러스트를 이해한 사람은 주로 Eco쪽에 찬사를 돌리는 경향이 있다. 환경을 파괴한 인류가 지닌 Ego(나) 중심 사고를 고발하고 Eco(생태) 중심 사고로의 전환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Lynn White같은 학자는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성경관, 특히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마저 그 파괴에 앞장섰다고 고발한 바 있다. 

그러나 Ego를 그릇되게 이해한 자들이 Eco마저 오해하는 것이다. 환경과 생태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선 영어 “I”로 번역되는 이 라틴어 Ego는 본래 “나”를 뜻하는 희랍어 εγώ에서 온 말이다. 반면 영어 eco- 접두사가 될 Eco는 “집”을 의미하는 희랍어 οίκος에서 왔다.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은 <집>에서 비롯된 셈이다. 그런데 인류는 신으로부터 지구의 다른 종들과는 달리 <이름>을 하사 받았고, 그 다른 종들 <이름>은 인류가 선사했다. 사람의 <이름>을 신이 지어준 것과는 달리 다른 종의 <이름>은 사람이 지었던 것이다. 이는 신의 용인과 묵인 아래 그리 되었다(c.f. 창 2:29). 여기까지가 Eco의 본원적 형식이다. 하지만 인류는 종의 <이름>만이 아니라 자기 신들의 <이름>까지 짓는 오류를 범했다. [유대인은 자기 신의 이름을 신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다는 형식을 취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제3계의 침범을 우회하려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이름>은 <법>의 형식에 다다른다. 인간은 <법>으로 살상하며, 그리고 그 <법>은 <이름>으로 인간을 살상하는 형식인 것이다. 진정한 Eco(환경)의 파괴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름>(nomen)이 <법>(nomous)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신께서는 자기 이름을 법 파괴적인 <이름>으로 밝히셨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다”(I AM WHO I AM) 또는 “나는 ...이다”(Ego Eimi)라고 이르셨기 때문이다. 즉 그 이름 자체가 바로 <Ego>인 것이다.

그 이름이 예수라는 한 인물의 자아(ego)를 통해 우리 심장에 들러붙고 말았다. 인류를 지은 자의 이름도 Ego요 인류의 이름도 Ego요 그것을 순환케 한 이의 이름과 삶도 Ego라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창 1:28의 “정복”이 정복이 아닌 “지킴”으로서의 카바쉬였음을 다시 주석한다. [2012.7.2.일자]


프린서플 | 어떤 집을 원하는가.

아담에게 에덴동산이라는 환경이 ‘집’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은 바로 Eco로서 환경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집은 어떤 집이며, 또 어떤 집이기를 원하십니까? 참된 집은 다음 세 가지를 충족합니다. 


공간.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를 우상의 도시로부터 떠난 인물로 이미 전제를 하고 보기 때문에 그것을 단지 종교적 행위로 보지만 지구상의 모든 세대는 자신들의 아버지 집을 떠난다는 점에서 그 의미의 궁극은 세대의 교체를 의미 합니다. 공간은 교체를 이룬 각 세대가 소유하게 됩니다


시간.

집은 기억을 보존합니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어머니를 기억하고 형제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기억이 전혀 보존되어 있지 않은 환경은 결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집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은 집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나는(Ego) 존재해야 집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 집에 있다 하더라도 Ego 즉 나의 자아가 거주할 수 없다면 집이 아닙니다.


프린서플 | 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집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가 집을 지킬 것인가. 어머니가 지키려니와 어머니마저 없으면 누가 지킬 것인가. 형이 지킬 것이거니와 형마저 없다면 <나> 즉, Ego가 동생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家長) 없는 집이란 없거니와 이리하여 <나>가 없으면 <집>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일러스트 Ego라는 좌측 그림은 Eco라는 우측 그림에 언제나 선행한다 할 것입니다. 어떤 집인가 이전에 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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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7. 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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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그림에 대한 오용이 있어 몇 자 적는다.

환경을 파괴한 인류, 특히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들 마저 그 파괴에 앞장선 데 대해 격분한 사람들이 우리 인류가 지닌 Ego(나) 중심 사고를 겨냥해 Eco(생태) 중심 사고로써 고발하는 용도로 이 기발한 그림을 인용한다.

그 외에도 진정한 생태를 걱정하는 고발이 아닌 이 땅 모든 정복자들을 향한 괜한 격분의 안티로서 가세하는 인용도 있는 것같다. 내가 보기엔 그 고발자도 새로운 개념의 정복자로만 보인다.

영어 “I”로 번역되는 이 라틴어 Ego라는 말은 본래 “나”를 뜻하는 희랍어 εγώ에서 온 말이다. 반면 영어 eco- 접두사가 될 Eco는 “집”을 의미하는 희랍어 οίκος에서 왔다.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이 <집>에서 비롯된 셈이다.

사회적 지탄뿐 아니라 Lynn White와 같은 학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성경관은 이미 고발된 상태다. 그러나 그를 포함하여 Ego를 그릇 이해하는 자들이 저런 그림을 만들어냈다. 지구의 환경과 생태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는 신으로부터 지구의 다른 종들과는 달리 <이름>을 하사 받았고, 그 다른 종들은 인류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았다. 인간의 <이름>을 신이 직접 하사하셨던 것과는 달리 다른 종들의 <이름>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다. 이것은 신의 용인과 묵인 아래 그렇게 된 것이다(창 2:29). 여기까지가 Eco의 본원적 형식이다.

그러나 인류는 다른 종의 <이름> 만이 아니라 자기 신들의 <이름>을 짓는 오류를 범하였다. 유대인들은 자기 신의 이름을 짓지 않고 간신히 물어보는 것으로 끝마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제 3계의 침범으로서는 같은 형식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의 형식이 <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은 <법>으로 살상한다. <이름>(nomen)이 <법>(nomous)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그러나 신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묘한 이름으로써 밝히셨다. 그것이 바로 <Ego>다. 이 <이름>이 예수라는 한 인물의 자아(ego)를 통해 우리 심장에 들러붙고 말았다. 인류를 지은 자의 이름도 Ego요 인류의 이름도 Ego요 그것을 순환케 한 이의 이름과 삶도 Ego라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창 1:28의 “정복”이 정복이 아닌 “지킴”으로서의 카바쉬임 다시 주석한다.

집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가 집을 지킬 것인가. 어머니가 지키려니와 어머니마저 없으면 누가 지킬 것인가. 형이 지킬 것이거니와 형마저 없다면 <나> 즉, Ego가 동생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家長) 없는 집은 없거니와 <나>가 없으면 <집>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Ego 좌측 그림은 Eco 우측 그림에 선행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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