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2. 23. 03:47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임마누엘>이지만 임마누엘이 지닌 맥락을 정확히 알고 쓰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것이 권위 있는 한 예언자 <입>을 통해 계시된 줄은 알지만, 악한 어떤 왕의 <귀>를 통해 계시된 사실도 다 배제된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릴 적부터 슬픈 날과 맞붙은 기쁜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3일 전인 22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의 설레임을 다 만끽할 수 없었다. 22일 동안은 우울함과 동행하다가 3일간만 설렐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는 누구에게나 부모의 추도일이란 게 그렇듯이 불효에 대한 회상과 동행하다가는 크리스마스의 설렘은 잠시만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임마누엘>을 이해하는데 남다른 도움을 주었다.


(1)


<임마누엘>을 최초로 계시 받은 그 악한 왕이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말한다. 열왕기 역사가와 역대기 역사가 모두가 악으로 지목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악이란 게 우상숭배를 말하지만 독특하게도 그는 이방 나라의 제사 단상의 디자인을 들여와서는 똑같이 따라 만든 인물이다. 그렇게 제단의 식양을 들여옴으로 기존의 제사 도구나 식양들은 다 구석에 처박아 둔 죄를 지적당하고 있다(왕하 16; 대하 28).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는 일종의 역사 기록물이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팩트만 기록하고 있다. 즉 지극히 역사가적인 필치로만 기록하다보니 사법적이면서도 - 심판 받듯 - 여타 이야기 플롯이 그냥 묻힌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 이사야서에 바로 그 묻힌 플롯이 묻어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그에게 전달하기를, “너는 징조를 ‘깊은 데에서든’ ‘높은 데에서든’ 구하라”(사 7:11)고 하였는데 그의 대답이 독특하다.


나는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12절)   



얼핏 들으면 믿음의 격식을 갖춘 말 같지만 직역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대써요!” 이다. 과격하게 하나님을 배격하지는 않지만 완강하게 그것을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은 플롯, 즉 우리의 삶과도 같은 것이다.


(2)


(열왕기/역대기와 같은) 역사가의 사법적 - 심판주的 - 진술과는 달리 이사야 선지자에게서는 이 악한 왕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계시되고 있다. 포기하지 말고 징조를 구하라는 것이다.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자포자기 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여기서 일방적으로 <임마누엘>을 강권하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윗 가문의 일원에게 주어지는 기회인 것이다.  


(3)


몇몇 빼고는 워낙 악명 높은 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하스 같은 왕은 기억에서 사라지면서 그 <임마누엘>이라는 기호도 그냥 묻힐 뻔하였다. 그것을 살려낸 것이 바로 신약 공동체, 그 중에서도 마태라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 임마누엘이라는 기호를 천사의 <입>을 통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귀>를 통해 복원해냈다(마 1:18-25).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아하스의 귀를 통해 계시된 기호였음을 상기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처지는 바로 그 아하스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 남성은 위대한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일 뿐이다(막 1:16). 아무도 다윗 왕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잠들어 있을 뿐이다(마 1:20, 24).


(4)


우리의 우상숭배는 어디 으슥한 점치는 곳에 들어가 점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쇠함이다. 희망 없음이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음이 바로 우상숭배다. 아하스와 요셉의 영적 상태에 부쳐 더 구체적으로는 어떤 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가문에 대한 상실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어머니)의 아들(딸)인가? 아니면 단지 어떤 목사인가? (아니면 어떤 직장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녔던 희망을 상실할 때 우상숭배인 것이다.



(5)


아하스가 “나는 도무지 구하지 않겠나이다-” 하는 것처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잠들어’ 있을 때,


이사야가 <임마누엘>을 계시한 것처럼,

천사가 <임마누엘>을 계시한다.


그러면서 “마리아를 데려와라!”고 주지 시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리아를 주저하지 말고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싫은 표정으로 마치 잠든척 하고 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도상(圖像)이다.


(* 그러므로 요셉의 저런 표정이 대부분의 <요셉의 현몽>도상을 주도하는 이유이다.)




에필로그 | 임마누엘의 기원


임마누엘( עמנואל / Immanuel).

임(with) + 마누(us) + 엘(El)

이 복합 단어 중에 El 보다도 중요한 게 바로,

”(Im/with/עמ)이다.


왜냐하면 야웨라는 하나님의 궁극적 성명의 기원 동사가 되는 “하야”(to be)에 얽힌 그 모든 시제 즉, 과거(was), 현재(is/is-ing), 미래(will be)를 담고 있는 전치사가 바로 ”, “함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이름도 이 기원 아래서 도출되어 나온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2013.12.22. 대강절4주차 | 임마누엘에서 가장 중요한 것 | 사 7:10-17; 마 1:18-25, (cf. 시 80:1-7, 17-19;  롬 1:1-7.)


  


'말씀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은 자(remnant) 인플레이션  (0) 2014.01.06
때(a time)가 있다.  (0) 2014.01.02
어떻게 사막화가 되는가  (0) 2013.12.16
노아의 방주의 본말  (0) 2013.12.02
앙갚음을 끊는 길  (0) 2013.11.27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2. 16. 09:40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는 본문을 설교하려다 보니 내 자신이 교회를 <사막화>시킨 부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단계를 통하여 나는 한국교회의 사막화에 일조한 일면이 있다.

 

(1) 전통교회를 비판하면서


1-2세대 부흥사들은 천막집회 등지에서 신유와 이적 등 강력한 은사를 통해 먹고 살길 막막했던 민족을 위로하고 일깨워 그들의 영육이 성장할 수 있게 했지만, 말년에 그들은 자기교회를 구축하고 축재하거나 형편없는 자손에게 교회를 부(富)로 물려주었고, 신도들은 자기 일가에 맹종하는 맹목적 신자로 전락시켰다. 이런 논조를 골자로 비판의 날을 세워왔으나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신유와 이적을 실행하기엔 역부족인 나 자신의 영성을 변증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2) 신흥 자본교회를 비판하면서


한 대표적 신흥교회의 VIP Room(새신자 영접실)을 방문했을 때 그곳 담임 목회자로부터 이런 노하우를 들었다. “‘우리 교회에 오려면 이 정도는 돼야한다’라는 암묵적 코드를 지역 주민에게 심어준다.” 이후 나는 이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자본교회들이 얼마나 세속화 되었는지를 고발하면서 “그렇다면 노숙자들은 어쩌란 말이냐? 노숙자들은 이 화려한 VIP Room에 들어오지 말라는 코드냐?”라며 힐난하였다. 


(3) 한 지방 교회에서 근무하면서


그러다가 지방의 한 교회에서 근무할 당시 정말로 한 노숙자가 예배드리러 왔다. 나는 그의 곁에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의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예배 내내 내 머리 속은 온통 ‘다른 새가족이 시험 들면 어쩌지?’라는 생각으로부터 ‘만약 내가 단독 목회하는 교회라면?’이라는 공상에 빠져 ‘저런 분이 오면 어떻게 대처하지?’라는 상상이 급기야 ‘우리 교회에 오려면 이 정도는 돼야한다-’라는 암묵적 코드로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4)


나의 경험을 예시로 한국 교회가 사막화 된 일면을 예시할 수는 있었지만, 내가 그 <사막화>를 어떻게 돌려놓을 수 있는지를 설교하기에 막막했다. 그래서 이런 주제로 금주에 설교를 하지 않을 생각도 하였다. 그런 패배감에 젖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음 몇 가지 사막화를 저지하고 비구름을 불러들일 수 있는 나의 경험을 환기시켰다.


(5) 


나는 원천적으로 ‘일천번제예물’이라는 비성서적 행위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새벽마다 그것을 실행하는 노인들의 헌금봉투를 받아들고서는 내 이성이 깨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체험을 토대로 나는 내가 가진 신학과 지식을 걸고 그 할머니들의 정성어린 신앙을 수호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의 요약은 다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천번제도 비성경적이다. 송구영신도 비성경적이다. 송구영신에 말씀 뽑기(?)도 비성경적이다. 그럼 성경적인 건 무엇인가? 유대적인 것? 유대인들이 준수했던 바로 그것? 중세교회적이지 않은 것? 한국적이지 않은 것? 이른바 성경적인 사람들은 뼛속까지 유대인 같은가? 우림과 둠밈은 뽑기 아니고 뭐였던가? 옛것은 보내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신앙은 너무나도 지극히 성경적이며 말씀을 뽑는다는 행위도 신점으로 뽑는 행위라고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그 뽑은 말씀대로 “살며,” “준행 하겠다”는 의지로서 예언적 말씀을 가르치면 그것이 성경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는 신점대로 어찌어찌 하다 보니 십자가에 달린 자인가 아니면 신점으로 뽑힌 그 모든 갈망 담긴 말씀들을 의지를 사용해 모두 준행한 준행자인가? 이것이 예언의 본질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 그 “성경적인 자”들 지론에 의하면 504번째 비성경적인 예물이 있다. 이 분의 기도제목은 한결같다. 504번째를 지나도록 한결같다. “주님 아시지요” 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4:10-11) 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읽어도 자꾸 까먹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쓰러울 따름이다. 형식은 질료를 담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막화>를 저지할 수 있는 첫 번째 예시이다.


(6) 


지방 교회의 새벽 기도는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시며 그들의 기도란 것이 거의 ‘탄식’ 그 자체일 뿐이다. 눈물샘도 마른 노인들의 탄식은 편견과 도그마를 깨뜨렸다. 그 무엇으로 노인을 구원할 수 있을꼬.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중에 매일 새벽에 30분을 걸어오는 수족이 불편한 분이 계셨는데 감사절기의 하루였던 어느 날 헌금함 앞에 서서 어깨에 둘러맨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한참을 낑낑 거렸다. 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꺼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것을 꺼내 드리다가 그 봉투에 쓰인 액수를 보고 말았다.


나보다 적은 액수였다. 그렇지만 새벽마다 5분이면 걸을 거리를 새벽마다 30분 걸려서 걸어오고, 게다가 주일 점심식사는 식판을 들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주일 남의 신세 지기는 싫고 그래서 그냥 점심식사를 안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수고로움과 불편함을 생각하면, 내 것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고 부끄러워서 그대로 올려놓지를 못하고 거두어들여 헌금을 더 넣을 수밖에 없었다.


(7)


그리고 끝으로, 생각해보니 나는 성공적으로 노숙자를 돌보지는 못했지만, 수십 년간 새벽과 철야 기도로 예배당을 지켰지만 말년에 우울증을 맞아 고통 받던 한 노인 권사님을 몇 개월 심방한 일이 있다. 그 노인에게서도 냄새는 났다. 나는 그런 일을 잘 못하는데 마음을 바쳐 성심껏 실행했다. (참고로 나는 담임목사가 아니었으며 담임목사가 지시한 일도 아니었다.) 성탄과 송구영신에 즈음하여 남편 되시는 장로님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목사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사실 나는 내가 부교역자로 있는 교회마다 연말이면 유복한 분들이 돌리는 각종 선물들이 있게 마련이었은데 받지 않았다. 아니 안 받을 수는 없으니 받고서는 집으로 가지고 오지 않고 교회에서 바로 어려운 분들을 나눠 주었다. 어려운 분들을 생각하는 마음 보다는 아마도 별로 귀감이 되지도 않는 그들의 선물을 내다 버리고 싶은 못된 마음이 더 컸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난한 이 노부부의 봉투를 받아들고는 실로 마땅함과 말할 수 없는 연민과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중량감으로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척 하면서 한참을 눈물 짓고 말았다.


(8)


<사막화>를 저지할 수 있는 그것은 외국의 신학 이론도 아니요, 어떤 화려한 마케팅 테크닉도 아니요, 가장 말석에 앉은 저분들이 물려주는 신앙 유산이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하게 되면서 금년 성탄 대강절을 희망차게 지나가고 있다.  




에필로그 | 사막화에서 옥토화


과학자들은 사하라 같은 광활한 사막이 사막화 된 과정을 발견했다. 그것은 비가오지 않기 때문에 사막화가 된 것이 아니라 토지의 나무를 제거해버림으로 말미암아 비구름을 불러올 수 없었다는 학설이다. 나는 이 학설을 믿는다. 

심긴 것을 제거하면 사막화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고 키워내면 다시 비구름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2013.12.15일자 설교 | 어떻게 사막화 되는가 | 사 35:1-10. 마 11:2-11 (cf. 눅 1:47-55; 약 5:7-1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2. 2. 05:44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 매장되었다며 찾아 헤매는 노력은 실로 허망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방주가 지닌 '본말' 보다는 그것을 채증해보이겠다는 '과학'에 대한 맹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맹신은 대개 방주를 축조해낸 한 ‘가정의 이야기’라는 본말 대신에 그 방주의 크기에 더 관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발굴한 방주가 생각 보다 작으면 어쩌려고? 아니 이미 발견했지만 생각보다 작아서 죄다 내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1)


우리나라 경인운하에 <아라뱃길>이라는 유람선 코스가 지난해 5월에 생겼다. <아라>라는 말은 <바다>의 옛말로 소개되었지만 그것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순수 우리말인 <알/아라>가 “아주 넓고 큰 곳”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바다>의 옛말로는 <바랄>이 있기 때문이다.


(2)


<아라>는 히브리어로는 땅이라는 뜻이다. 흙으로서 땅(에레츠)이라기보다 세계/세상이라는 의미로서 땅이다. 하나님 은총의 부재는 줄곧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지는 혼돈으로 나타났다가(천지창조, 노아의 홍수, 홍해...etc), 은총이 임할 때 다시 그 경계가 생겨나곤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아라랏>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땅과 물의 경계인 그 방주(Ark)가 떠돌아다니다가 정박한 산의 지명일 수 있지만, 아라랏이라는 의미 자체에 담긴 노아 가족의 산행(山行)은 이미 세상과는 구별된 항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 <아라>라는 음소에 담긴 의미가 이와 같은 ‘바다’라는 빠롤을 품고서 우리나라의 랑그에게까지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라뱃길...


(3)


나는 아르메니아의 한 도심에서(Armenia Kotayk) 바라본 아라랏 산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고서는 그 산 자체가 마치 방주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대에도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만약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가 그 산과 일체를 이룬 그 어떤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거세게 몰아닥치는 홍수를 항해했던 그 방주는 바로 그 산(山) 자신일 수도 있었겠다는 극히 실존론적 결론에 다다른다. 


노아의 신통력이 현대식 잠수정을 만들었을 것으로 기대하는 현대인과 몇몇 과학자들의 이상한 상상력을 무참히 파괴하는 논지라 미안하지만, 바로 이 방주는 그 <아라>가 가진 기원에 더 충실하다.


<아라>는 땅인가? 바다인가? 아니면 땅이면서 바다인가?


이리하여 노아의 방주는 "더럽혀진 '땅'을 항해했다"는 음소(音素)가 지닌 본말의 탈환이 이루어진 셈이다.


(4)


게다가 이러한 음소의 탈환은, 노아의 방주가 1년여를 떠돌다왔는데도 출항했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돌아와 정박한 것만 같은, 다소 당혹스런 대목을 (잠수정을 그려가며 해명하려는) 창조 과학자들보다 더 잘 설명한다.


그렇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그 자리에 고정된 채 1년을 항해했을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산에 고정된 방주가 급한 물살들을 항해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5)


이 음소 탈환의 목적은 과학이 수여하는 헛된 망상을 제거하고 그 이야기의 본말에 관심케 하기 위한 일종의 기도(企圖)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본말은 이렇게 전하신 바 있다.


(가) 홍수전에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다. (마 24:38)성경은 방주의 실측 크기를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의 본말은 노아의 가족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 보다 본말은 거기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38b절)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음만 보고 결혼하던 혼잡과 그 시대 자체의 폭력성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라는 평범한 일상으로 주석하셨다. 즉 구별이 없었음이 본말인 것이다. 

(다) 홍수가 나서 모두 멸망하면서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39절)당시에는 비라는 것이 오지를 않았다. 성경은 안개만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5).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재앙의 전조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경험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경험을 우선시 하는 믿음은 계시를 믿지 않는 태도의 기본 양식이며, 그런 태도는 물이 목까지 차오를지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인식의 마비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법.


(6) 


방주는 한번도 배(ship/오니야)였던 적이 없다. 성서는 배라고 하지 않고 시종일관 방주(테바)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잠수함’이라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Box(궤)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 궤는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을 담은 용기였으며, 시온 산 예루살렘에서도 그 용기에 그렇게 담아두었다(cf. 사 2:3). 


여기 아라랏 산이 그 가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에필로그 | 공학적 상상력 Vs. 문학적 상상력


이와 같은 상상력은 노아의 방주를 현대식 잠수정으로 설계하고 재현해내는 공학적 상상력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종의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해두자.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창조과학과 같은 식의) 공학적 상상력에 더 내맡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만약 도킨스(Richard Dawkins)와 같은 사람을 만나 논쟁을 하다가 말문이 막히거든 바로 그 때, 이 문학적 상상력을 한번 꺼내보시기를-.

 



* 2013.12.1일자 | 노아의 방주의 本말 | 마 24:36-44. (cf. 사 2:1-5; 시 122; 롬13:11-14.)



* 이미지 참고: http://www.doopedia.co.kr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1. 27. 02:03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1세기경 로마의 관리 중에 페다니우스 세쿤두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에 약 4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다. 당시의 로마가 시내 관리를 위해 약 700명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이다. 그런데 그 집에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침실에서 일하는 노예 중 한 명이 주인을 살해한 것이다. 당시는 네로 치하였는데 개인적인 원한으로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 집에서 일하는 모든 노예들이 처형되어야만 했다. 그 400여 명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야만족이 아니었던 로마 시민에게 있어 그 같은 살육은 지나친 처벌임에 틀림이 없었다. 특히 귀족과 평민들 간에 이견이 팽배했던 모양이다. 평민들은 이 같은 처벌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원로원의 공식 논의에서 처벌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무엇보다 네로의 군대가 개입해 형을 집행해버렸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노예의 목숨은 주인 손에 달려있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제도의 근간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참한 여건 속에서 노를 젓는 갤리선의 노에나 채석장 노예들 보다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의 환경은 훨씬 안락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주인의 뜻에는 절대 복종해야 했으며, 위반 시의 처벌은 엄중했다.



본론 | 자기 십자가


흔히 ‘자기 십자가’라고 하면 ‘가난’, ‘질병’ 등 자신에게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불행을 이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실제 본문에서 자기 십자가를 언급한 문맥은 신앙의 규모에 관한 것이다.


망대를 세우는 자와 막 전쟁에 나가려는 왕의 비유가 그것인데(눅 25:28-32), 망대를 세우는 사람은 기초만 닦아 놓고 그 비용 예산을 잘못 세워 미처 준공을 하지 못한 자이다. 또한 그 왕은 자기네 나라보다 두 배나 더 되는 병력을 보유한 왕을 치러 나가려는 무모한 자이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는 그 크기와 무게에 부쳐 자기 신앙의 궁극적 실효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성서일과는 이 같은 자기 십자가 본문과 함께 빌레몬서를 한데 엮어 제시한다. 


빌레몬서.

빌레몬서에 ‘자기 십자가’를 얹는다면 그 십자가는 누구의 것이 될까? 감옥 생활 하는 우리의 바울? 아니면 무서운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노예, 오네시모?


우리는 빌레몬서를 읽을 때 그 표제어로서 ‘빌레몬’은 언제나 무시하고 그 서신의 주된 활동 주체인 바울과 오네시모에게만 집중해온 일면이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주연이요, 오네시모는 조연이라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지나치게 당연시 하는 우리는 언제나 주인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를 놓임 받아 마땅한 인물로-, 주인 빌레몬은 마땅히 그를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로-, 

심지어는 그를 놓아주라는 바울의 당부를 거역하기라도 하면 당장에 그를 지옥에라도 보낼 심산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빌레몬에게 너무나도 심한 요구를 한다.


그러나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페다니우스 세쿤두스에 다름 아니다. 오네시모를 죽여도 되는 지위와 권리는 어떤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엄한 사회법이다. 노예 해방 시대를 넘어온 우리에게는 페다니우스는 죽어 마땅한 <주인>이요, 오네시모는 해방됨이 마땅한 <노예>이지만 당시에 노예법은 결코 부덕이나 위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오네시모, 빌레몬 가운데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진 인물은 빌레몬인 셈이다. 


우린 언제나 스스로를 바울 아니면 오네시모 역을 자처해왔다. 그러나 실상 우리 자신은 빌레몬으로서 ‘나의 오네시모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십자가는 완성되는 것이다.




에필로그 | 나의 오네시모


나는 이 설교의 말미에 뜬금없이 다음 문맥을 읽어 주었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에게 준 상처 때문에 분노한다. 부모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 분노하는 이유는 사랑을 받고 싶어서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 p. 134>

이것이 오늘날의 궁극적인 빌레몬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나의 오네시모는 내가 분노하는, 내가 좀 더 사랑 받고 싶어했던,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바로 그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만큼 우리 자녀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해주면 된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 즉, 앙갚음을 끊는 길 아니겠는가.




2013년9월8일자 | 자기 십자가| 눅 14:25-33; cf. 몬 1-21. (c.f. 렘 18:1-11; 시 139:1-6, 13-18.)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1. 25. 01:18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야웨 치드케누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성경에서 정의는 신의 이름과 결합된 칭호이기 때문이다. <야웨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즉, <야웨 우리의 공의(義)>라는 칭호가 그것이다(렘23:6).


“야웨 치드케누”라는 말은 예레미야가 미래의 왕으로 메시야를 예언할 때 언급된 이름이다. 한글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읽혀 단지 평이한 문장으로 묻혀 읽히기 십상이지만 영어 역본에서는 언제나 대문자 LORD OUR RIGHTEOUSNESS로 표기되는 중요한 이름이다.


“야웨 치드케누”는 본래 다윗 왕가 최후의 왕이었던 시드기야를 거꾸로 써서 만든 말이다. 


거기에는 다윗계열의 왕권 회복을 기원하며 현재 임금이 해내지 못한 공의를 실행할 왕의 도래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현재의 왕은 불의한 왕(여호야김)이었거나, 두 눈이 뽑혀 남의 나라를 섬기는 신하가 되어버렸다(시드기야). 이 상황과 거꾸로 된 상황을 기원하는 언어유희이다. 현실의 파라독스인 셈이다. (시드기야의 수난 당하는 모습이 메시야의 수난과 유비된다는 견해들도 있다.)


이와 같이 공의를 메시야의 이름에 넣어 예언으로 선포하는 행위와, 그러지 않고 그것을 자기들 이름에 넣어쓰는 사제들이 저주문 낭독 따위를 예배로 둔갑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의가 실제로 어떻게 시연되는지는 같은 성서일과인 십자가 도상 두 강도의 대화 장면이(눅 23:33-43) 잘 보여주고 있다.




본론 | 공의가 집행되는 현장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펼쳐낸다. (다른 복음서에는 대화가 없다.)


(1)


첫 번째 남자가 말한다.

“네가 만약 그리스도이거든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


저것이 과연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죽는 마당에 나올 수 있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우리 가운데는 분명 죽어가면서도 저렇게 말할 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악에 받힌 경우. 


(2)


이어서 두 번째 사람이 앞선 남자를 꾸짖으며 말한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동일한 정죄”라는 말은 무엇과 동일하다는 것인가? 어색한 문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번역을 좀 더 다듬었을 때 그것은,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경우와) 동일한 판결을 받았다.”


라는 문장이 된다. 이것은 앞서 몸만 죽이는 권세가 아니라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권세 가진 자를 두려워하라는 눅 12:4-5과 연결된 표현이다. 그는 이어서 계속 말한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두 번째 사람이 앞서 조롱한 사람을 꾸짖으며 예수께 구원을 청하는 장면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강도 모두 그리스도를 욕하며 조롱한다. 즉 여기서는 세 명 간의 <대화>가 되는 바람에 재판/심판장의 형식을 띠게 된 것이다.

  

(3)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옳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에 대한 판결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자기 모두의 보응을 “동일한 판결”로 인식한데 대한 판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기억하소서-”에 대한 판결문이다.


(4)


누가는 이것이 단순한 처형의 한 장면이 아니라, 공.중.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심판 도상임을 증언하였다. 


이것이 다른 복음서에서 ‘강도’라고만 했던 이들을 ‘행악자’라고 부른 이유이다. 행악자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판결”을 받은 자들에 해당하는 보편적 호칭이다.


(5)


예레미야는 “야웨 우리의 공의(야웨 치드케누)”께서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고 한 바 있다(렘 23:5). 정의는 무엇이고 공의는 무엇인가? 70인역 번역에서 정의는 크리마이고 공의는 디카이오수네이다. 크리마는 심판을 말하며 디카이오수네는 로마서식의 義가 될 것이다.


이 義와 심판이 어디에서 집행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그곳은 바로 공중, 즉 십자가 위에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 속에서 그 심판정이 매주일 열리는 것이다. 교회 바깥 저주문 낭독 현장이 아니라.




에필로그 | 공의(公義)에 관한 두 착각


두 가지 착각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자기들이 가진 구원의 확신으로 가는 줄 착각하는 경우이다. 강도 한 명이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만 남기고 있는 걸로 봐서는 자신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판(크리마)이 마치 손오공이 타고 노는 구름 위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이다. 심판이 벌어지는 공중은 바로 십자가 공중 위에서 벌어지는 이 <대화>에서다. 그것이 디카이오수네, <공의>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것은 다소 해묵은 주제, 목적격적 소유격이냐 주격적 소유격이냐는 문제를 안고 있는 <피스티스 크리스투>의 이해를 위한 플롯 버전 정도가 되기도 할 것이다.]



2013.11.24일자 | 공의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 렘 23:1-6. 눅 23:33-43 (cf. 눅 1:68-79; 골 1:11-20.)



 

'말씀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의 방주의 본말  (0) 2013.12.02
앙갚음을 끊는 길  (0) 2013.11.27
내 입을 크게 열면 뭘 넣어주시겠다는 건가?  (0) 2013.11.22
만질 만한 불, 소멸하는 불  (0) 2013.11.20
추수감사절 폭로  (0) 2013.11.18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