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0. 1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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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 게시되고 있는 “말씀 속에서” 아티클이 현재 7월분부터 밀려 있는 상태입니다. 7, 8, 9월분을 먼저 올려서 최근 아티클 발행 템포와 맞출까 하다가 우선 최근 것 템포를 맞춰 가면서 7, 8, 9월분을 섞기로 했습니다.



프롤로그 | 우리나라의 나병(한센병).


나병은 구약성서에서 천형으로 묘사되거나 문둥이라는 표현으로 전라/경상도 욕설일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돼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에 강제 수용해 그들의 인권을 짓밟았다. 당시 병원장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선행을 베푼다고 언론에서는 미화되었지만 실제는 강제노역, 여성과 남성의 분리, 불임수술 등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일명 물방이라는 독방에 가두기도 했는데 방 구조가 문턱이 높고 고의로 물을 채워 넣은 구조로 이는 나병환자를 하루라도 빨리 죽이기 위한 고안이었다. 이 물방에 갇힌 나병환자는 겨울이 되면 물방의 얼음이 얼어붙는 바람에 얼어 죽기도 했다. 그 병원장은 살해당하였다.


광복이후에도 비토리섬이라는 곳에서는 토지소유문제로 분쟁이 발생 지역주민에게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그들은 비극의 역사를 걸어왔다. 이들의 처우가 개선된 것은 1965년 당시 소록도국립병원장이 소록도에 거주하는 환자들을 배려, 과수업, 양돈업 등으로 자립을 할 수 있게 하면서부터였다. 축구팀도 만들어 그들이 몸만 불편할 뿐, 정상인보다 못한 게 없음을 보여주었다.


나병은 2000년 경 법률적으로 한센병이라는 명칭으로 공식화된다. 나병과 한센병은 의학적 의미에서는 같으나 사회적 의미에서 다르다. 나병은 치료약이 없어 환자의 형상이 말기까지 진행되던 때의 명칭이라면 한센병은 치료가 되는 병으로서 의미가 있다. 리팜피신 600㎎ 1회 복용이면 3일 이내에 전염성은 없어진다는 사실이 오늘날 한센병 치료의 개가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강력한 항나제를 1980년대 초반부터 환자 전원에게 투여해 오고 있다. (원글: 위키피디아, 한국한센복지협회)


프린서플 | 복음의 가치는 순종인가 자유인가 (2)

본문: 눅 17:11-19. (c.f. 렘 29:1, 4-7; 시 66:1-12; 딤후 2:8-15.)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구절(1-10절)의 내용을 통해 구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 실족: 연자 맷돌/Me ------------->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1-4절)

- 믿음: 뽕나무/Gentile ------------> 바다에 심기우리라. (5-6절)

- 순종: 일하고 돌아온/종 ----------> 식사 수발/무익한 종. (7-10절) 


여기에다가 금주의 본문 11-19절을 같이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감사: 나병환자/Gentile ----------> 돌아온 Gentile/사마리아인. (11-19절)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자는  “나”  입니다.

믿음으로 바다에 심기는 뽕나무는 “이방인” 입니다.

그렇다면,

일하고 돌아와 피곤함을 무릅쓰고 식사 수발을 드는 “무익한 종” 역시 “나” 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으로 돌아온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자세한 내용은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652781511420938)


이와 같이 “나/무익한 종”과 “사마리아인/돌아온 이방인”의 대조됨으로써 실족케 하는 무익한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처럼 될 것인가를 핵심 문제로 던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금주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나병환자, 그 돌아온 나병환자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이 중요합니다.


(1) 멀리 서서(afar off)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가까이 올 수 없어서 입니다. 그 대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자비)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높여 구한 것입니다.


(2) 보시고(saw), 보이라(show).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셨습니다(saw). 그러시더니 제사장에게 하거 ‘너희 몸을’ 보이라(show)고 하셨습니다. 전혀 보여 주지 않으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귀담아 들을 대목입니다.


(3) 가다가(set off)
그랬더니 그들이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닿아서 고침을 받은 게 아니라 가다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출발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지점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set off, 즉 출발하자마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출발하자마자 나은 것입니다.

(4) 돌아와(turned back)
그럼에도 10명 중 1명이 돌아오게 됩니다. 도착지에 거의 도착해서(돌아오기에는 먼 거리라서) 뿔뿔이 헤어졌다면 이해가 갈런지 모르나 출발하자마자 병이 나았는데도 1명만 돌아오고 만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 본심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종의 근성인지 감사의 근성인지.
돌아온 그는 그냥 돌아온 게 아니라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 이 네 단계 과정에서 생각되는 자신의 적용을 이야기 나눠 봅시다.


에필로그 | 오는 것(to come)과 돌아오는 것(turn back).

지난주에 연하여 이번 본문 역시 자유에 관한 본문 입니다. 오늘날 종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Freedom과 Liberty, 즉 똑같은 자유이지만 여기서 형성되는 간극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억압하고 - 기꺼이 억압 받고 - 방종을 합니다. (이 Freedom과 Liberty에 관해서는 다음 아티클을 참조하세요: https://www.facebook.com/MiMoonChurch/notes)


지금까지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사입니다. 

“나”(연자 맷돌)는 바다에 “빠졌다”면 “뽕나무”(이방인)은 바다에 “심기어”집니다.

“나”(무익한 종)은 일하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인 거기다가 나병까지 걸린 이 사람은 “돌아와” 있습니다.


무익한 종에게 사용한 동사는 에이세르코마이,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에게 사용한 동사는 휘포스트레포로서, 후자는 “돌아와” 있는 것에 반해 전자는 아무 힘 안들이고 “들어와”(to come/to enter) 있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은 그냥 언제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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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0. 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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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엘리야의 승천.


엘리사가 벧엘을 지날 때 아이들이 놀리자 저주를 받아 곰에 찢겨 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선지자의 위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진노로 보아야 할까? 이 본문을 들어 현대식 목사가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한 넌센스다.


* 엘리야가 승천하기에 앞서 엘리사가 따르는 장면(왕하 2:1-2, 6-14)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프린서플 | 무엇을 따르는가 어떻게 따르는가.


“따르라”(눅 9:59)고 했을 때, 따르는 데에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따르는 것 즉 따라붙는 것(tag along), 애착으로 따르는 것(be attached to), 목표를 따르는 것(go after),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obey), 행동으로 따르는 것(act on), 법률적으로 따르는 것(abide by/comply), 이들은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낫다거나 더 못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적시 적소에 사용될 때 온전한 ‘따르기’가 될 수 있는 요건들이라 하겠다.



본문에서 엘리야를 따라가는 엘리사 역시 위의 모든 요건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는데도 엘리사는 열심히 따라붙고 있다(tag along). 


(2)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들의 제자들이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라고 만류 하는데도 “너희는 잠잠하라” 하고서 계속 따를 정도로 애착이 있다(be attached to). 


(3) 또한 엘리야가 떠날 때뿐만 아니라 벧엘과 여리고를 지날 때에도 연속해서 “너는 여기에 머물라” 하는 데도 그 목표점을 놓지 않고 따른다(go after). 


(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있게 해달라는)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을 때 시키는 대로(obey)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본다.


(5) 그렇게 엘리야가 승천하고 나자 그는 자기 옷은 둘로 찢어 버리고는 엘리야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들어 엘리야가 앞서 행했던 대로(act on) 물을 쳐서 가른다. 


(6) 아울러 끝으로, 여리고에서는 ‘고치고’ 벧엘에서는 ‘저주를’ 한 일은 상당히 법정적인 것에 따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comply). 여리고는 증언을 했고 벧엘은 조롱을 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예수님의 승천.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마을을 저주하지 않으셨다. 저주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도리어 꾸짖으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따르는’ 태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❶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는 집도, 굴도, 머리 둘 곳도 없으시다고 하셨다(58절).

❷ 예수께서는 죽은 자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다(60절).

❸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62절). 


신약,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 왔을 때 승천이라는 주제는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 줌(SHOW)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 속 승천을 어떻게 잘 승계하고 계승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9장은 그걸 강조하는 것이다.


2013년 6월 30일자 분, 본문, 왕하 2:1-2, 6-14; 눅 9:51-62. (c.f. 시 77:1-2, 11-20 갈 5:1, 13-25.)


이미지 참조:

www.christianhumanist.or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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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3. 10. 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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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는 사실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국에선 거의 왕따 같은 삶으로 여생을 마쳤다.

불편한 인권을 들추고 다녔기 때문에 우파들이 더이상 그녀의 장애를 칭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촘스키는 깨어있는 좌파의 영예도 누리고 있지만, 생활은 강남을 한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 아마 주식도 한다는 것같다. 사유재산을 부인하기도 한 그가 말이다.

헬렌 켈러 같은 여성은 마땅히 언제나 우리의 경의의 대상이지만, 촘스키 같은 영악한 노인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좌파의 표상이다.

http://www.hoover.org/publications/hoover-digest/article/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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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3. 10. 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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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란 걸 하게 되면 통상 녹취 자격 있는 사람이 받아적더라도 그 대화에 등장하는 각종 용어를 모를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에 대해 잘 아는 관계자에게 초안을 건낸다. 맞는 단어인지 수정하라고.

(들리는 빠롤은 같아도 몬 말인지 모르니 랑그로 조율하는 셈이다.)

그런 다음 그 녹취 기록자에게 다시 돌려주면 수정한 빠롤이 자기(녹추자)가 들은 빠롤과 같은지 확인하고는 자기 면허 및 자격으로 인증을 해준다.

바로 요 과정을 대화/녹취의 초안이라고 부른다. 이런 수준의 초안을 DB에 넣고 관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안 개념을 잘 모르는 것 같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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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2013. 10. 4.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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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주로 인문학 강의를 하다보니, 굳이 선입견을 불러 일으킬 필요도 없고 해서,

목사라는 건 안 밝히고 실라버스 프로파일에 <철학박사>라고만 해서 내보내면,

학기 초에 학생들이 나에게 꼭 물어보는 말이 있다.

"교수님, 혹시 운명ㆍ운세도 볼 줄 아시나요?"

(속으로'그럼 어떠케 목산데~')

"네 볼 줄 압니다~"

...라고 답 할 수밖에~ㅎ


(이미지: 오늘 오전에 길 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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