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1. 14.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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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분간’이라는 말은 관찰하고 깨닫는다는 뜻이 있지만(도키마조)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석>하고 어느 정도의 <해석능력>을 가졌는가?


(1) 


가령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라는 말이 “폴루메로스 카이 폴루트로포스 팔라이 호 테오스...토이스 파트라신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라는 희랍어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도저히 주님의 말씀을 접근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언어에서 다른 한 언어로 옮겨지는 것도 해석이다.


(2) 


그런가하면 요한계시록의 666(계13:18)과 같이 숫자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해석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한 때 사람들은 이 666이 뜻하는 바가 상품의 바코드와 일치한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곧 일어난다고 선포하였다. 벌써 25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상품의 바코드는 666이 아닌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3) 


그렇다면 아래 본문의 경우(앞의 것이 계시록과 같은 상징의 형식이었다면 이것은 시편과 같은 예로 엔크립의 강도가 전자보다 더 센 것이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라고 했을 때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주로 아래와 같이 해석하지 아니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뭔가 무미건조한 해석이라고 여겨지는가?


   ① 과거 요셉 시대의 회고다.

   ②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의미하는 교훈이다.

   ③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계시이다.



----


문자든 그림이든 그 무미건조함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해석행위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은폐된 것을 찾아냄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앞서 (1)항의 해석은 문자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문자를 모르면 백만 천사를 대동하고 살아도 해석할 수 없다. 사전이 없으면 백만 번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이치이다. (2)항의 해석은 그림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숫자를 계산한 것같지만 그것은 그림에 해당한다) 유사한 형식, 반대의 형식을 지각하고 분변하는 감각을 이용해서 해석하는 능력이다. (게슈탈트라고 했던가?) 따라서 감각이 무디면 해석에 곤란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3)항의 해석은 앞의 두 가지 해석 능력에다가 한 가지가 더 요구되는 해석인데 그것은 <이해>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가? 자신을 이해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는가?



에필로그 |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그 본문의 진정한 해석의 키는 이름의 배열에 숨어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본문의 해석을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배열 코드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째서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라고 하거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이라고 하거나,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이라고 하지 않고 유독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오로지 요셉의 베냐민에 관한 애틋한 정서를 반영한다. 어린 베냐민을 살기 등등한 형들 밑에 두고 타향살이 해야 했던 요셉의 연민, 총리가 되어 형들을 대면했을 때 베냐민의 안위 먼저 물었던 베냐민에 대한 그의 연민, 그것은 어머니가 베냐민을 낳자마자 죽었을 때 어린 요셉에게 배태된 끝없는 안쓰러움이었으며 또 그것은 후일 요셉 일가의 호위 속에서 자라나 첫 번째 왕(사울)을 배출할 정도의 유서 깊은 부족으로 생존해 남은 결실로 꽃을 핀다.


이것이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는 순서쌍에 대한 분간 즉, 해석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해석에 다다를 수 있은가? 


문자해석? 숫자해석? 그림해석? 그것은 앞서 주님이 가라사대,“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책망을 상기하는 바, <시대> 즉, 요셉과 베냐민과의 그 애틋한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 기록된 <시대>라는 낱말이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인 이유이기도 하다. 카이로스 곧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수많은 시간 가운데서도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 바로 그것인 셈이다.  


이것이 가장 우월한 궁극적 이해로서 해석 형식, 곧 시간을 타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2013.8.18일자 | 시 80:1-2, 8-19; 눅 12:49-56. (c.f. 사 5:1-7; 히 11:29-12:2,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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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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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어디든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교회다.” 도발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이 같은 외침이 한국 교회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인가. 27일 일요일 오후 서울 신사동 R호텔에 위치한 나이트클럽. 스피커를 통해 무대에 울려퍼지는 사운드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나 랩의 굉음이 아닌 찬양 소리와 '아멘'이다. 서울 강남권에서 '물' 좋기로 유명한 이 나이트클럽에서 찬양 예배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째다. 예배 인원만 해도 매주 700명에 이른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힘든 '나이트 클럽 예배'를 기획한 주인공은 서울 온누리교회 청년부 '갈렙공동체'. 담당교역자인 김상수 목사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라고 의미를 정리했다. 일반인들이 기존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엄숙하고 폐쇄적인 이미지를 벗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접근하겠다는 얘기다. 갈렙공동체의 '세속' 진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젊은이들의 미팅장소인 스타벅스와 KFC에서의 새벽기도회로 확대됐다. 우리 사회 젊은 세대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적극적으로 다가선다는 전략의 하나다. 온누리교회는 이미 갈렙공동체 외에도 2~3개의 청년 조직이 홍대 앞 클럽과 대학로의 소극장 등을 예배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6.8.10일자 동아일보>

이것은 당시 트렌드로 자리매김하던 이른바 <열린 예배> 형식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형식의 예배로서 한 일간지에서 취재했던 기사의 일부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공동체에서는 성전건축을 아예 지양하고 체육관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성전건축 자체를 아예 체육관 형식으로 짓는 사례도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예배와 성전의 관계를 탈착 가능한 공간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각종 프로그램도 교회(건물로서) 바깥과 호환성 높은 것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요”

 

은도 하나님 것이요 금도 하나님 것이라는 성전 건축을 북돋는 학개서의 이 말씀이 오늘 날도 예전 처럼 들려올까? 왜냐하면 요즘처럼 성전 건축이 사회문제가 되던 때는 없었기 때문이다. 


70년 동안의 포로생활 후 이스라엘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이들의 귀환은 3차에 걸쳐 진행되는데 스룹바벨 지휘 하에 약 5만 명 정도가 들어오는 1차 귀환 프로그램 때에 학개라는 인물도 함께 들어온다.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를 바로 이들이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곧 사마리아가 주도하는 압력에 의한 난관에 부딪쳐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그 적대자들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성전 재건을 지원하라는 명을 받게 되면서 공사는 속개될 수 있었지만, 유다인으로 명명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집과 땅을 먼저 보수했다. 


왜냐하면 어떤 나쁜 뜻에서 그런 게 아니라 포로기 오랜 기간의 방치로 땅도 황폐화 되었고 거주할 집도 없는 상태여서 자신들의 생활 거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활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그 기간이 무려 14-16년 정도나 흘러가버렸던 것이다. 이때에 바로 학개가 나선 것이다.


그는 스가랴와 함께 백성들에게 성전 중건을 선행할 것을 메시지로 선포한다. 은금이 내것이라는 말씀도 이 때에 들려준 예언이다. 학개의 사역은 매우 짧았다. 약 4개월에서 1년 정도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렇지만 그의 메시지의 효력은 약 한 달 이내에 급속히 나타났다. 그 메시지의 3주 만에 백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사가 중단된 이래 B.C. 520년 경 다리오 왕 때에 건축이 재개되었는데, 마침내 B.C. 515년에 성전을 봉헌하게 된다. 이때 중건될 성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성전.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우주(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공간 요소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큰 공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전이바로 전체요 전부요 중심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 전체를 뒤흔든다는 뜻이다.


(2)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는 성전.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라는 사물들을 영토적 의미로서 공간이라고 규정한다면 ‘나라’는 시간으로서 공간이라 규정할 수 있다. 그래야만 그 ‘모든 나라’에는 현재의 나라들뿐 아니라 그동안 열리고 닫혔던 모든 나라를 소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 말로 모든 시간을 뒤흔다는 말이다. 


(3) 영광이 충만한 성전.


역사적 성전들은 여러 모양으로 여러 방식으로 모욕당하고 파괴당하고 방치당해 왔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채워졌던 적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서 뿐이었다. 



에필로그 | 우리의 성전


성서일과(lectionary) 평행 본문 중에 누가복음 20장27-38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 이야기를 다룬다. 이것이 성전 중건을 촉구하는 학개서 본문과 평행하게 놓여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사두개인과의 부활 논쟁이 다름 아닌 성전에서 발생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성전의 자리에서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갖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저지하였지만(학개의 시대처럼) 특별히 여기서 사두개인으로 집약되는 자들은 부활에 대한 독특한 의구심으로 가로막는다. 일곱 남편 있는 여인이 죽으면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 의구심은 어떤 고차원적인 사두개파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질문 같지만 실은 그들의 영성이 생활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영적 귀결을 생활 중심의 부활로 인식하는 우리네 자아상을 대변한다.


따라서 오늘 날 성전의 진정한 준공이 지체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금융의 부재나 미결로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학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텍스트 본질을 떠난 각종 생활 종교로서 행사의 분주함으로 그 준공이 지체되고 저지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요”의 본 말이다. 


예배 드리러 나이트클럽으로 모이라고 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 어디 가 있는지 모르겠다.



2013.11.10일자 설교. | 제목: 조금 있으면 | 학 1:15b-2:9; 눅 20:27-38. (cf. 시 145:1-5, 17-21, or  98; 살후 2: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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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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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문맥 속에 놓고서 설명하는 이 유명한 믿음의 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히브리서의 믿음을 토대로 부정적 예시의 제사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겠다.


(1) 욥의 제사: 유비무환, 확실히 해두자. 


욥은 자녀들을 위해 (또는 자녀들로 하여금) 빈번하게 제사를 드리게 했다. 자녀들이 파티를 끝내고 돌아오면 차례대로 그들을 불러다가 깨끗함 받도록 제사를 드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들 명수대로 (한 제물로 한 번에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하였다.


(2) 사울의 제사: 빨리빨리, 또는 책임소재 미상. 


사울이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는 단초는 사무엘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사무엘과의 갈등은 한 제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울은 급한 전투를 앞두고 있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싸우러 나가야 했다. 그런데 제사를 집례 해야 할 사무엘이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친나머지 사울은 단독으로 제사를 감행했다. 사울의 불법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항변한다면 그는 명시적 ‘왕’이라기 보다 사사의 한 사람으로서 제사 집례가 아예 불가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순종하지 않았다’는 명시적 과오 외에도 총체적 책임소재의 미상인 제사였다. (왕의 제도가 도래하기까지는 사무엘의 자식관리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3) 엘리의 제사: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 


엘리의 아들들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오면 태워서 제사 드릴(번제) 고기를 미처 태우기도 전에 날것으로 강탈해 가곤 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려도 강제로 가져간 것이다. 이때 엘리 제사장은 귀가 잘 들리지를 않았다고 성서는 기록한다.


(4) 가인의 제사: 반 믿음(Anti-faith)의 제사. 


가인과 그의 제사는 ‘실패한 예배’의 모든 예배의 표상이다. 제사 직후의 이야기들로만 채워져 있어 자인과 아벨의 제사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두 개의 목소리가 등장할 뿐이다. 가인의 마음과 판단력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목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하심 속에서 등장하는 아벨의 목소리. 여기서 믿음의 제사와 반(反) 믿음의 제사로 갈리는 것이다. 



(5) 히브리서에서 제시하는 믿음의 제사.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제사는 위 네 가지 제사들이 아닌 것을 말한다. 특히 저 유명한 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자동차? 집? 명예? 각종 환경과 사물의 물리적 형체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실상”(휘포스타시스)은 바라는 그것들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문장이다. OK?


. 실상 ≠ 바라는 것

. 실상 = 믿음


(* 실상/휘포타시스는 1:3 그 본체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본체”와 같은 말이다)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파괴하고 공백으로 비워버린다. 믿음은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자동차나 명예가 과정이고 본질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공백인 셈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벨의 소리 없는 목소리의 원리인 것이다. 그래야 천국이제.



* 2013.8.11일자 설교, 믿음과 반(反) 믿음 | 히 11:1-3, 8-16. (c.f. 사 1:1, 10-20; 시 50:1-8, 22-23; 눅 12: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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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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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익명(Anonymous)에 대한 문자적 유래 입니다. 

Anonymous(어나니머스)는 onym이라는 말에 a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된 말이다. onym은 name의 어근이다. onyma은 onoma와 더불어 희랍어로서 onym에서 'o'가 탈락되고 음가를 통해 name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ous는 ‘있는’(full)이라는 접미이고 a(n)는 부정(not)이다. 이렇게 해서 이름(onym/name)이 없다(an/not)는 뜻 즉, ‘이름을 숨긴’을 뜻하는 ‘익명의’라는 어휘가 태어나 ‘가명의’라는 뜻은 물론 ‘무명의’(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특징이 없는’(이름을 붙일 수 가 없는)이라는 뜻으로까지 사용되었다. ous가 빠진  anonym은 ‘가명, 변명, 익명, 작자 불명의 저작’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리고 anonymous에서 an을 제거하면 ‘이름이(onym=name) 있는(ous=full)’으로 쓰면 ‘이름을 밝힌’이 된다. 또 접두를 바꿔서 몇가지 단어가 나온다. acronym은 ‘이름(onym)의 첫 글자(acro=head)’라는 뜻에서 ‘두문자어’가 되었다(AIDS같은-). allonym은 ‘다른(all=allo=other) 이름(onym=name)’이라는 뜻에서 ‘필명’(남의 이름으로 출판된 작품) 등의 말이 되었다. antonym은 ‘반대되는(anti=against) 이름(onym=name)’이라는 ‘반대말’로, synonym은 ‘같은(syn=same) 이름(onym=name)’이라는 ‘비슷한 말’로, homonym은 homo(same)가 붙어서 ‘동철이의어’이 되었다(can[깡통]과 can[할 수 있다]의 예). patronymic은 ‘patro(father)’와 결합되어 ‘아버지의 이름을 딴’이라는 뜻으로, pseudonym은 pseud(거짓의, 가짜의)와 결합되어 ‘익명, 아호’의 뜻으로 활용되었다. 이상 anonymous의 용법이다.


다음은 그 익명에 대한 몇 가지 예시입니다.

(1) 조직이나 집단 속에서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 속해서 나의 뜻을 관철 시킬 때, “누가누가 이렇게 말하더라”(“-카더라”: ○○가 ~라고 하더라)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 의견을 발의하고, 제시하고, 대변하고, 반론하고, 관철시킵니다.


(2) 가난한 자와 약자 앞에서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붓자, 제자 중 하나(가룟 유다)가 책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가난한 자는 가룟 유다가 사용하는 익명입니다. 즉 삼백 데나리온은 가난한 자가 아닌 자기가 갖고 싶은 재물인 것입니다. 


(3) 형제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요셉을 해한 형제들은 요셉의 옷을 아버지에게 가져나가 보이면서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라고 말합니다. 가인은 자신을 “아우를 지키는 자”라는 익명 속에 자신을 감추고, 동생을 해한 형제들은 자신들이 해한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익명 속에 감춥니다.


(4) 원시인들의 경우


다음은 민속학적 고찰인데, 미개인이나 원시인들은 자기 종족의 왕을 뽑을 때 경건하게 뽑습니다. 어찌나 경건하게 생각하는지 왕이 쓰던 물건에 자기 신체가 접촉하기라도 하면 큰 일이 날 것처럼 여길 정도입니다. 어느 날 왕의 쓰던 물건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걸 안 순간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실제로 죽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같은 신적 권위가 있는 왕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종족의 안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하늘에서 비가 오게 하는 것까지 포합됩니다. 가뭄이 들면 그 왕은 어떻게 해서든 대개 비가 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아무리 해도 비가 안오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왕을 세운 종족은 가차없이 그 왕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왕을 세웠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왕을 세워 나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있어 왕은 욕구와 그 앙갚음의 익명의 대상인 것입니다. 


위에 열거된 예시들은 모두 익명(anonymous)에 관계된 인간이 갖는 행태입니다. 


(5) 십자가에서


그 익명성을 모두 제거하고 일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드러냈고, 또한 자신의 실체를 밝혔으며,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익명이 아닙니다. 그의 실명 나사렛 예수께서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달리실 당시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열거된 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익명성인 것입니다. 즉 익명이 아닌 실명으로 하였지만 그것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철저한 희생일 때 형성되는 익명성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의 본질이며, 그래서 이름(onym)은 그와 같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2013.7.28일자 설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 눅 10:1-4; 골 2:6-15 (c.f. 호 1:2-10; 시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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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4.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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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소개했던(지난 2/25과 2012/07/02 )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GO는 ‘자부심/자존감’이라는 뜻에서 ‘자아’라는 심리적 의미까지 폭넓게 쓰입니다.

ECO는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집’이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실 ‘이기주의’(EGO)를 지양하고 조화로운 환경(ECO)을 지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성서는 여전히 자아를 통해서 환경에 이르는 전통을 진리로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파워 블로거가 날이면 날마다 ‘신사참배’와 ‘독재’ 청산만 외쳐대는 걸 보고서 “그럼 다니엘과 예레미야도 친일파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은 “네 친일파입니다.” 이 답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호로 자식을 봤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그를 기억에서 꺼 버렸다.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 이런 어휘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 민족이 지닌 기본 EGO의 혈액까지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드는 바람에 마치 내가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를 찬양하는 자처럼 만들어버리는 EGO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본다. (단 7:1-3, 15-18)



다니엘은 소년기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왕이 여러 차례 바뀌도록 압제자 나라의 중요 관직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다니엘서는 그의 꿈과 환상 그리고 그 해몽을 통해 그가 하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당대 박수들과는 달리 정보를 활용할 줄 알았다. 오늘 날의 엘벤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정도 될까? 그는 자기가 살던 시대를 중심으로 수백 년의 세계 정치·경제·행정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주로 그가 섬긴 왕들과 정권의 카운슬링을 담당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의 자아를 통해 인식되고 나타났다. 즉,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내다봤던 것이다. 

특히 인자(人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자아가 그를 통해 인식되었다.



(2) 그리스도는 자아(EGO)를 통해 성령(ECO)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아로서 이 땅에서 충실한 자신의 생애를 사시고, 이어서 그의 제2 자아로서 성령을 보내셨다. 포스트 보.혜.사. 즉, “또 다른 보혜사”란 그 뜻이다. 이미 자신의 EGO는 보혜사인 것이다. (둘째 아담, 다윗의 자손, 새 모세, 人子.., 다 그의 EGO에 관한 다른 말들이다.)



(3) 바울은 성령 받은 자아(EGO)를 통해 교회(ECO)를 설립해나갔다. (엡 1:11-23)



바울의 자아는 확실하게 성령 받은 사실을 인식한다. 성령 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방언으로 아나? 통역과 예언으로 아나? 느낌(feeling)으로 아나? 무엇으로 그것을 아나? 교회라는 ECO를 통해서만 <성령 받은 나의 EGO>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박수나 무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니엘처럼.



(4) 복과 화(ECO)는 자아(EGO)를 통해 임한다. (눅 6:20-26)



금주의 성서일과표(Lectionary) 마지막 성구는 두 개의 ECO(환경)을 제시한다. 복과 화. 전자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의 EGO를 지닌 사람들이 들어가고, 후자는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의 EGO가 들어가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친일, 신사참배, 독재, 이것들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김준곤의 CCC도 군사정권 부역의 산물로 부정하는 역사인식의 동향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EGO를 측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지닌 EGO의 모든 혈액을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들던 사람들이 금번 WCC에 가서는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면서 변증하는 모습을 보고서 뿜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비록 환관이었지만 - 그가 자신의 EGO를 살리려고 환관이 되었는지 민족의 EGO를 생존시키기 위해 환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자신의 후세들이 마음껏 배타적 제2성전 시대를 향유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은 자신의 꿈과 함께 그렇게 스러져 갔다.


훗날 이 배타적 제2 성전 시대 주도자들은 ‘사마리아’라고 하는 거대한 열등감을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끼리 칭찬하고 자기들끼리 칭찬 받는 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스도라는 종말은 바벨론이나 페르샤에 떨어진 게 아니라 사마리아 바로 옆 동네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열등감은 EGO의 아름다움을 좀먹는다.

허영은 EGO의 아름다움을 부패시킨다.


2013.11.3일자, 제목: 계시의 영을 주사 | 엡 1:11-23; 눅 6:20-26. (cf. 단 7:1-3, 15-18; 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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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