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서2012. 9. 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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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과 유심론(唯心論)을 강의하기 위해 영화 밀양(密陽)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이 영화의 중심축이 용서에 관한 피상적 이해와 비판인 것은 맞지만, 그 피상성(superficiality)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가해자 보다 피해자인 신애(전도연)에게 더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1_ 그녀는 극한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후 용서를 실천한다. 하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자식 잃은 사람으로서 그리 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그녀는 아들 죽인 살인자를 찾아간다. 용서하러.


#2_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해주러 왔어요.” “나도 전에는 몰랐어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안믿었어요.” “안보이니까 안믿었죠.” “우리 준이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알고 새 생명을 얻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나님 사랑을 전하러 왔어요.”


#3_ 그녀가 쏟아내는 이런 꽃말들은 일종의 ‘준비되고 학습된’ 대사이다. 게다가 자기 아들 살인자에게 그 꽃말들과 함께 전하기 위해 들꽃까지 꺾어 온 것을 볼 때 그녀는 반드시 둘 중에 하나다. 정말로 그녀가 하나님을 만나 극락에 출입하고 있거나 아니면 거짓말 하고 있거나.


#4_ 그녀가 감행하는 용서의 목적은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용서의 언어들과 거기에 보태어진 들꽃이 그녀가 지닌 철저한 자기애를 반영한다. 그 자기애적 이상이 그 대사들을 창조하고 학습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마디로 나르시시스트다.


#5_ 그녀의 자기애적 새 삶에 대한 몽환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영화 전반부에서 포착된다.


#6_ “왜 밀양에 왔는가”라는 물음에, 남편이 당한 불의의 사고를 설명하고는 “죽은 남편의 꿈이었던 밀양으로의 귀향을 통해 새 삶을 일구러 왔노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일찍부터 그 피상성을 눈치 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그런 이상을 제공할만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도와 불륜으로 도리어 그녀의 이상을 파괴한 인물이었다. 


#7_ 이것이 그녀가 지니고 있는 꿈의 실체인 동시에 그가 구현해내고자 했던 용서의 피상성이다.


#8_ 영화의 초반부에 밀양 토박이(송강호)에게 “밀양”의 뜻 말(은밀한 볕)을 일러주면서 “멋있지 않나요-” 하며 나른한 느낌을 만끽하는 표정은 그야말로 나르시시즘을 전조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9_ 그러므로 이후 그녀의 반신론적 실천들은 살인자의 뻔뻔스런 속죄와 구원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구축하려던 이상적 새 삶의 초석이 되고 있는 그 나르시시스틱한 용서를 선점 당해 빼앗긴데 대한 분노와 보복인 셈이다.


#10_ 그러므로 그동안 기독교 안팎에서 비판하고 자성했던 그 살인자가 지녔던 용서받은 자로서 초연한 자태는 무엇이라 딱히 규정하기는 사실 어렵다. 불안정한 그녀의 눈에 비쳐진 기독교 일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르시시스트였던 그녀가 그리스도교로 귀의하려다가 아예 <유물론>과 교섭을 이루어 급선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살인자가 보여준 확신에 찬 용서는 차라리 <유심론>에 가깝다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갇힌 육체를 통해서 상상하기 가장 쉬운 천국은 육체를 완벽하게 배제한 유심론적 구원 밖에 달리 없지 않았겠는가.


#11_ 한편 그 모든 물질적 실체를 부인하는 이 유심론적 용서에 맞서기 위해 내밀 수 있는 카드란 역시 유물론적 용서 밖에 달리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유물론에 종사하는 한 맥락이다. 그래서 유독 이 영화의 여주인공 신애는 구토를 많이 한다. 정신이 아닌 물질이라는 것이다.


#12_ 그녀는 마지막을 거울로 마치려 한다. 미용실에서 그 살인자의 딸에게 머리칼을 맡겼다가 이내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혼자만의 거울 앞에 다시 앉는다.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다. 나르시시스트들의 종착지인 것이다. 


#13_ 이 영화의 감독이 칸에 가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빛을 담은) 창공의 하늘로 시작해서 (빛을 담은) 땅바닥의 더러운 개숫물로 마치는 구도에 그토록 많은 해석들이 있었던 것같다.


#14_ 그의 말대로 하늘이 아닌 땅에 역점을 두고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해석학적 기도는 시종일관 나르시시즘에 더 종사한다. 주인공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고통의 궁지에 몰린 절대 약자로 산출해내는 것도 나르시시스트의 전통적 자기애 형식이다. 하나님의 장로를 유혹하여 배 위에 올려놓고는 그 하늘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보고 있느냐”며 나직이 그렇지만 비장하게 쏘아붙이는 프레임은 영락없는 <To Die for> 니콜 키드먼의 나르시시즘이다. 


#15_ 나르시시트를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바람에 이 영화가 꾀하려 했던 종교적 경계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세상엔 실제로 기독교와 반기독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윗물(창공)과 아랫물(개숫물), 그리고 그 사이에 빛들, 또 그리고 여러 가지 나르시시스트들이 있을 따름이다.


#16_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신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거울을 가지고서 조절을 할 뿐. 


#17_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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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