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1. 27.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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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1세기경 로마의 관리 중에 페다니우스 세쿤두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에 약 4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다. 당시의 로마가 시내 관리를 위해 약 700명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이다. 그런데 그 집에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침실에서 일하는 노예 중 한 명이 주인을 살해한 것이다. 당시는 네로 치하였는데 개인적인 원한으로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 집에서 일하는 모든 노예들이 처형되어야만 했다. 그 400여 명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야만족이 아니었던 로마 시민에게 있어 그 같은 살육은 지나친 처벌임에 틀림이 없었다. 특히 귀족과 평민들 간에 이견이 팽배했던 모양이다. 평민들은 이 같은 처벌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원로원의 공식 논의에서 처벌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무엇보다 네로의 군대가 개입해 형을 집행해버렸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노예의 목숨은 주인 손에 달려있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제도의 근간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참한 여건 속에서 노를 젓는 갤리선의 노에나 채석장 노예들 보다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의 환경은 훨씬 안락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주인의 뜻에는 절대 복종해야 했으며, 위반 시의 처벌은 엄중했다.



본론 | 자기 십자가


흔히 ‘자기 십자가’라고 하면 ‘가난’, ‘질병’ 등 자신에게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불행을 이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실제 본문에서 자기 십자가를 언급한 문맥은 신앙의 규모에 관한 것이다.


망대를 세우는 자와 막 전쟁에 나가려는 왕의 비유가 그것인데(눅 25:28-32), 망대를 세우는 사람은 기초만 닦아 놓고 그 비용 예산을 잘못 세워 미처 준공을 하지 못한 자이다. 또한 그 왕은 자기네 나라보다 두 배나 더 되는 병력을 보유한 왕을 치러 나가려는 무모한 자이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는 그 크기와 무게에 부쳐 자기 신앙의 궁극적 실효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성서일과는 이 같은 자기 십자가 본문과 함께 빌레몬서를 한데 엮어 제시한다. 


빌레몬서.

빌레몬서에 ‘자기 십자가’를 얹는다면 그 십자가는 누구의 것이 될까? 감옥 생활 하는 우리의 바울? 아니면 무서운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노예, 오네시모?


우리는 빌레몬서를 읽을 때 그 표제어로서 ‘빌레몬’은 언제나 무시하고 그 서신의 주된 활동 주체인 바울과 오네시모에게만 집중해온 일면이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주연이요, 오네시모는 조연이라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지나치게 당연시 하는 우리는 언제나 주인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를 놓임 받아 마땅한 인물로-, 주인 빌레몬은 마땅히 그를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로-, 

심지어는 그를 놓아주라는 바울의 당부를 거역하기라도 하면 당장에 그를 지옥에라도 보낼 심산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빌레몬에게 너무나도 심한 요구를 한다.


그러나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페다니우스 세쿤두스에 다름 아니다. 오네시모를 죽여도 되는 지위와 권리는 어떤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엄한 사회법이다. 노예 해방 시대를 넘어온 우리에게는 페다니우스는 죽어 마땅한 <주인>이요, 오네시모는 해방됨이 마땅한 <노예>이지만 당시에 노예법은 결코 부덕이나 위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오네시모, 빌레몬 가운데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진 인물은 빌레몬인 셈이다. 


우린 언제나 스스로를 바울 아니면 오네시모 역을 자처해왔다. 그러나 실상 우리 자신은 빌레몬으로서 ‘나의 오네시모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십자가는 완성되는 것이다.




에필로그 | 나의 오네시모


나는 이 설교의 말미에 뜬금없이 다음 문맥을 읽어 주었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에게 준 상처 때문에 분노한다. 부모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 분노하는 이유는 사랑을 받고 싶어서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 p. 134>

이것이 오늘날의 궁극적인 빌레몬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나의 오네시모는 내가 분노하는, 내가 좀 더 사랑 받고 싶어했던,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바로 그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만큼 우리 자녀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해주면 된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 즉, 앙갚음을 끊는 길 아니겠는가.




2013년9월8일자 | 자기 십자가| 눅 14:25-33; cf. 몬 1-21. (c.f. 렘 18:1-11; 시 139:1-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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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25.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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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야웨 치드케누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성경에서 정의는 신의 이름과 결합된 칭호이기 때문이다. <야웨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즉, <야웨 우리의 공의(義)>라는 칭호가 그것이다(렘23:6).


“야웨 치드케누”라는 말은 예레미야가 미래의 왕으로 메시야를 예언할 때 언급된 이름이다. 한글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읽혀 단지 평이한 문장으로 묻혀 읽히기 십상이지만 영어 역본에서는 언제나 대문자 LORD OUR RIGHTEOUSNESS로 표기되는 중요한 이름이다.


“야웨 치드케누”는 본래 다윗 왕가 최후의 왕이었던 시드기야를 거꾸로 써서 만든 말이다. 


거기에는 다윗계열의 왕권 회복을 기원하며 현재 임금이 해내지 못한 공의를 실행할 왕의 도래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현재의 왕은 불의한 왕(여호야김)이었거나, 두 눈이 뽑혀 남의 나라를 섬기는 신하가 되어버렸다(시드기야). 이 상황과 거꾸로 된 상황을 기원하는 언어유희이다. 현실의 파라독스인 셈이다. (시드기야의 수난 당하는 모습이 메시야의 수난과 유비된다는 견해들도 있다.)


이와 같이 공의를 메시야의 이름에 넣어 예언으로 선포하는 행위와, 그러지 않고 그것을 자기들 이름에 넣어쓰는 사제들이 저주문 낭독 따위를 예배로 둔갑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의가 실제로 어떻게 시연되는지는 같은 성서일과인 십자가 도상 두 강도의 대화 장면이(눅 23:33-43) 잘 보여주고 있다.




본론 | 공의가 집행되는 현장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펼쳐낸다. (다른 복음서에는 대화가 없다.)


(1)


첫 번째 남자가 말한다.

“네가 만약 그리스도이거든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


저것이 과연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죽는 마당에 나올 수 있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우리 가운데는 분명 죽어가면서도 저렇게 말할 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악에 받힌 경우. 


(2)


이어서 두 번째 사람이 앞선 남자를 꾸짖으며 말한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동일한 정죄”라는 말은 무엇과 동일하다는 것인가? 어색한 문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번역을 좀 더 다듬었을 때 그것은,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경우와) 동일한 판결을 받았다.”


라는 문장이 된다. 이것은 앞서 몸만 죽이는 권세가 아니라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권세 가진 자를 두려워하라는 눅 12:4-5과 연결된 표현이다. 그는 이어서 계속 말한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두 번째 사람이 앞서 조롱한 사람을 꾸짖으며 예수께 구원을 청하는 장면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강도 모두 그리스도를 욕하며 조롱한다. 즉 여기서는 세 명 간의 <대화>가 되는 바람에 재판/심판장의 형식을 띠게 된 것이다.

  

(3)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옳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에 대한 판결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자기 모두의 보응을 “동일한 판결”로 인식한데 대한 판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기억하소서-”에 대한 판결문이다.


(4)


누가는 이것이 단순한 처형의 한 장면이 아니라, 공.중.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심판 도상임을 증언하였다. 


이것이 다른 복음서에서 ‘강도’라고만 했던 이들을 ‘행악자’라고 부른 이유이다. 행악자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판결”을 받은 자들에 해당하는 보편적 호칭이다.


(5)


예레미야는 “야웨 우리의 공의(야웨 치드케누)”께서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고 한 바 있다(렘 23:5). 정의는 무엇이고 공의는 무엇인가? 70인역 번역에서 정의는 크리마이고 공의는 디카이오수네이다. 크리마는 심판을 말하며 디카이오수네는 로마서식의 義가 될 것이다.


이 義와 심판이 어디에서 집행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그곳은 바로 공중, 즉 십자가 위에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 속에서 그 심판정이 매주일 열리는 것이다. 교회 바깥 저주문 낭독 현장이 아니라.




에필로그 | 공의(公義)에 관한 두 착각


두 가지 착각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자기들이 가진 구원의 확신으로 가는 줄 착각하는 경우이다. 강도 한 명이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만 남기고 있는 걸로 봐서는 자신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판(크리마)이 마치 손오공이 타고 노는 구름 위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이다. 심판이 벌어지는 공중은 바로 십자가 공중 위에서 벌어지는 이 <대화>에서다. 그것이 디카이오수네, <공의>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것은 다소 해묵은 주제, 목적격적 소유격이냐 주격적 소유격이냐는 문제를 안고 있는 <피스티스 크리스투>의 이해를 위한 플롯 버전 정도가 되기도 할 것이다.]



2013.11.24일자 | 공의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 렘 23:1-6. 눅 23:33-43 (cf. 눅 1:68-79; 골 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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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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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무관심


해럴드 라스웰(H. D. Lasswell)이라는 정치학자는 사람들의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 무정치적 태도, 정치의 가치를 인정치 않고 오히려 예술·과학 등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편이 정치의 그것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보이는 태도. (2) 탈정치적 태도, 자기의 정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크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과 영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환멸을 느껴 그 정치에서 탈퇴하는 태도. (3) 반정치적 태도, 어떤 종교적·도덕적·사상적인 입장에서 정치에 반대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입장으로서 도리어 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 

그러나 우리나라 경우는 위와 같은 이론으로 분류하기에는 어려운 ‘무관심’에 속할 것이다. 실상은 그 민족성 자체가 그 어느 민족 보다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응결된 상태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관심인 척 숨기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가는 사람을 잃게 되니깐?) 

하지만 성서의 편찬 자체가 정치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예레미야, 애가, 욥기, 열왕기, 역대기뿐 아니라 오경 전체, 그리고 마가, 누가.. 복음서들 외에 서신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정치 상황 아닌 문서는 없다. 다만, 그 편찬자들이 어떠 어떠한 정치색을 띠었다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상황 배후의 하나님을 조명할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오로지 천당과 지옥 얘기만 하는 목사라고 해서 신령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본론 | 예언자인가 정치가인가


(1)


다음은 예레미야가 활동하게 되기까지 배경이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때는 B.C. 627년 경이다. 요시야 왕 제13년에 해당한다(렘 1:2). 그는 상류 사회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곧바로 남 유다까지 압박해 오던 앗시리아가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그 위력이 정점에 다다랐을 무렵이다(유다 왕 므낫세 시대). 


그러나 앗수르의 힘이 급격히 떨어져 연합군이 되어 들이닥친 바벨론과 메대에게 니느웨를 내어줄 정도로 쇠퇴하게 된다(612년쯤). 이와 같은 세계국가의 패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틈타 남 유다의 요시야 왕은 내적으로 야웨 신앙 중심의 개혁을 가하고 밖으로는 북 이스라엘 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느고 II세에게 목숨을 잃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남 유다 왕으로 세워진다. (유대인들이 세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사로잡아가고 여호야김은 느고 II세가 세운 요시야의 다른 아들이다) 609년경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유다는 이집트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4년여가 지난 후 605년경 이집트가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유다는 바벨론 지배체제로 바뀌는 신세가 된다(렘 46:2). 3년 정도 지나 남 유다는 일차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 왕 여호야긴과 지도층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대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앉혀놓는다. 597년경의 일이다.


약 601년 경 유다는 두 번째 반모를 꾀한다. 바벨론이 이집트 원정에서 실패하자 예언자들의 예언 방향도 전환되는 추세를 보였는데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여론이었다. 급기야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의 후원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이집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것과 같이해 이웃 국가와 동맹을 맺어 마침내 바벨론에 반기를 든 것이다(렘 27-28). 바벨론 군대는 589년경 다시 유다로 들어와 예루살렘을 에워쌌고, 587년경 유다는 완전히 망하고 시드기야는 눈알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2)


예레미야는 한 마디로 말해 당시 친 바벨론 정치 노선을 펼친 예언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정치인이었다는 말도 아니고 그에게 특별히 정치적 취향이 남달랐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예언 사역이 전혀 시대를 외면하거나 소외 시키지 않고, 그 시대가 당면한 시대 속에 충실했음을 의미한다.  


(3)

그리스도인이라면 특별히 정치에 관심을 갖는 태도를 지양하는 것이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관심’을 지향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가 관심해야 할 부분이 오직 영적 분별임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런 바른 (영적) 관심에 몰입해 있을 때에 외부에 비치는 우리는 때로는 ‘무관심’ 혹은 특정 ‘정파’로 비칠 뿐이라는 사실 또한 일러준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나 우리는 정치가 아닌 예언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에필로그 |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그토록 유명한 말을 어쩌면 그렇게도 금은보화로 가득 채워준다는 말로만 알고 있었을까? 정말이지 청년기부터 접했던 목사님들께서는(특히 부흥강사님들) 한결 같이 내 입에는 재물이 채워질 것만 같이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이 말은 그 문장 앞뒤를 조금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사실은 그 입에 찬양이 없다고 야단을 치는 말이다. 그리고는 이내 그 입에다가 ‘찬양’을 채우겠다는 말인 것이다. 


집도 성전도 나라도 다 잃은 상태에서 누가 찬양을 하랴?! 찬양 부르라고 강제로 입을 벌리면 아마 인상쓰면서 다 자물통을 채울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본말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상황인 셈이다.




* 2013.9.1일자 |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 시 81:1, 10-16; cf. 렘 2:4-13. (c.f. 히 13:1-8, 15-16; 눅 14:1, 7-14.)

* 이미지 참조: sgilmore215.blogspot.com     crustybreadbl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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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978년. 테일러 외 두 명의 우주비행사는 깊은 수면에서 깨어나 바다에 불시착했음을 깨닫는다. 불시착한 그곳은 지구와 환경이 비슷하지만 다른 행성이었다. 행성을 탐사하던 테일러 일행은 곧 생명체를 발견하지만(그들은 유인원이다) 말을 타고 총을 쏘는 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행성에선 인간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미개한 종족이며, 유인원만이 언어와 기술을 습득한 진화된 종족이다. 일행 한 명은 총에 맞아 죽고, 테일러와 남은 한 명은 생포되어 유인원의 도시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테일러의 동료는 강제로 뇌수술을 당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고, 테일러는 유인원인 지라 박사 눈에 들어 약간의 지능 있는 특별한 인간 취급을 받는다. 테일러는 이 낯선 유인원 사회에 엄격한 계급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고릴라는 경찰, 군인, 사냥꾼 역할을 하며, 오랑우탄은 행정가, 정치인, 변호사, 마지막으로 침팬지는 지식인 및 과학자 계급이었던 것이다. 고릴라들은 테일러가 유인원 사회의 근간을 파괴하고 혁명을 이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테일러를 죽이려 하지만, 침팬지 지라 박사와 코넬리우스는 테일러의 탈출을 돕는다. 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한 테일러는 결국 고릴라들에게 잡혀 다시 끌려온다. 결국 테일러는 재판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지라와 코넬리우스는 사촌 루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테일러를 유인원 도시 밖의 금지 구역으로 데려간다. 코넬리우스는 금지 구역에서 이전 문명의 유물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 금지 구역에 다다른 테일러는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혹성탈출, 1969. 출처: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bsstory&logNo=50153822024)


이 영화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성역 곧, 신성한 곳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신성한 곳, 거룩한 곳이라는 말은 금지 구역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거룩한 것은 선한 것인데, 그 선(善)이 금지되어 있다?



본론 | 만질 만한 불


히브리서 12장에는 두 종류의 불이 언급된다. “만질 만한 불”과 “소멸하는 불”.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이 있는 곳이 - 아마도 시내산 - 아니라고 말하면서, 지금 있는 곳은 시온산이라 말하고는, 불 역시 소멸하는 불로 대체되었음을 공지한다. 불은 하나님의 메타포로 전자는 만질 만한 불이었지만, 후자는 (만질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라는 것이다. 전에는 만질 수 있던 불이 이제는 만질 수 없는 불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같은 불의 이행을 통해 나타나는 ‘금기’의 관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신성하다.


모세가 장인의 양무리를 칠 당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났다. 그 때 모세가 좀 더 가까이서 보고자 다가섰을 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말한다. 이는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면으로 취급되어왔다. 성서는 이 부분을 하나님과 사람이 대면하는 첫 장면으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말씀하신 상대는 모세뿐 이었다고 성서는 증언한다(출 33:11). 그리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온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고 나면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이러한 권위를 종교 지도자들이 고스란히 받아간다. 과거나 지금이나.


(2) 위험하다.


물론 성서에서 모세 이전에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많다. 그러나 호렙산(시내산)에서 모세와의 대면을 처음으로 꼽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법정적 관계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정적’이라 함은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다짐이 비로소 법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법을 토대로 긍정형 조문 248가지와 부정형 조문 365가지가 구성되는데 그것은 유권해석에 따라 더욱 확장되기에 이른다. 가령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병에서 놓임을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그 상황에서 안식일을 엄수 하지 않은 죄에 묻는 경우가 그 한 예다(눅 13:10-17).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백한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지키느냐에는 많은 변수와 해석이 따랐기 때문이다. 오로지 ‘위험하다’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3) 깨끗하다(더럽다).


‘금기’에 관한 세 번째 개념은 ‘더럽다’(깨끗하다)이다. 오물 만지던 손으로 식사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대인의 결례는 그 더러운 손에서 오물을 씻어내는 데에 근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 담갔다가 건지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강박인 동시에 쾌(快)인 것이다. 예컨대 유대인들의 코셔는 건강/웰빙인가? 종교인가?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강박인가? 모두 같은 것이다.

 


이들 세 가지로써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종교적 영향력은 행사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000여 년 전이었던 히브리서 저자가 이미 그 불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이행시키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소멸하는 불(혹은 강렬한 불)이라는 말은 히브리서 저자의 일종의 워딩으로서 마치 뭔가 더 강한 저주를 내리는 불이라는 표현 같지만 실상은 역설적으로 “만질 만한”에 대조된, “만질 수 없는,” 즉 없다라는 의미로서 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전에 강박으로 압박했던 그 모든 터부들이 이젠 없어져버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소멸하는 불


그 거룩한 성역에 대해 심증을 굳힌 테일러는 목숨걸고 그 금지 구역 진입한다. 거기서 유인원이 지배하는 이 행성이 사실은 인간이 지배했었던 곳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아낸다. 인간과 유인원 지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해변을 따라 걷던 테일러는 그 행성 끝에 다다라 무릎을 꿇고 깊은 탄식과 함께 이런 말을 내뱉는다.

“맙소사, 내가 돌아 왔구나.” 



우리가 만질 만한 불에 관한 강박에 시달리는 한 그것은 다 파괴된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돌로 된 불을 만지게 됨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2장 마지막 절 “소멸하는 불”에 관한 주석이다.



2013.8.25일자 | 히 12:18-29. (c.f. 렘 1:4-10; 시 71:1-6;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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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18.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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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Man at Work (1883)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한 화가로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때에, 경이로울 정도의 농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당시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테오. 내가 그들 가운데서 뭐든 형체가 될 만한 그 뭔가를 그린 풍경을 볼 것 같으면, 난 분명 풍경 화가는 아니야...” 이 그림만 보더라도, 여러 종류의 요소가 풍경 안에 위치되어 있지만 이내 인간의 형상으로서 직결된 이 인물의 손에다 우리 이목을 집중 시키고 있다. 여기서 이 남자와 자연은 함께 녹아내리고 있다. 마치 땅 위에 그들이 함께 심기어진 것처럼. 이러한 강력한 의제는, 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불변하는 역사적 실제였던 것이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이 그림은 헤이그에서의 동시대 화가들과는 전혀 부조화 된 마무리를 지니고 있었다. 대충 대충 먹여진 그 터치의 상스러움, 그리고 거친 표면의 처리는 깔끔한 마무리를 모든 완성의 기치로 여기던 당대 정서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태도였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언제나 이질적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그의 말에 잘 나타난다. "그놈들은(다른 화가들 혹은 일반적 사회 정서를 가리킬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언제나 결론 내리곤 하지...!" 

이런 고흐 자신의 성급한 기질은 이들에 대한 분노를 한 층 더 격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 같은 성격은 그가 감수해야 했던 예술적 한계만큼이나, 사회 구속에 관한 체제 전복적 이미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Josephine Cutts and James Smith, VAN GOGH (Parragon Book, 2001), 24-5.


본론 |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 가지


‘추수감사절’이라는 매년 같은 주제를 어떻게 다르게 설교하지? 라는 고민을 하고 앉아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영적인 타락을 느꼈다. 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여흥을 돋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일반이기 때문이다. 이런 평소답지 않은 유혹을 깨뜨리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는 다음과 같다.


(1) 


금주의 성서일과(Lectionary)는 새 하늘과 새 땅을(사 65:17-25) 추수의 감사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가장 큰 특성은 “내가 건축한 집에서 내가 살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재배한 포도를 내가 먹을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살지 못하고 자기가 재배한 포도를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나? 


있다. 소작인은 그렇다. 자신이 건축한 집인데도 살 수 없으며, 자기가 재배한 작물인데도 그것을 먹을 수 없다. 마치 제3세계 어린이들은 제1, 2세계 어린이가 가지고 놀 장난감을 만드는 노동에 종사하지만 정작 그것을 가지고 놀 수는 없는 이치이다. 


따라서 금주 본문은 감사라는 미명아래 마음껏 여흥에 취해 뛰놀라는 계시가 아니라, 추수를 착취하는 악습을 규탄한다. 특히 이런 악습은 바로 그 뱀이다(25절). 이리와 사자도 변화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지만 오로지 뱀만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끄트머리에 가서 이리와 사자와 뱀으로 마무리 하고 있는 이 본문에서 뱀은 여전히 흙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뱀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인데 왜 뱀은 흙을 먹는가?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던가? (cf. 창 3:14) 이리와 사자는 초식동물이 되는데 왜 뱀은 여전히 창세기 저주 상태에 있는가? 


흙을 먹는 뱀의 습성은 <착취>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사단 곧, 악이라고 하는 것은 막연하게 뿔 달린 모습이 아니라 바로 <착취>인 것이다.


과학주의나 이성주의로 똑똑한 현대인은 사람이 흙이었다는 사실을, 흙이 피부의 원료가 되는 막연한 화학반응 정도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악을 도깨비라고 상상하는 것처럼. 


질료와 형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흙이라는 질료는 화학반응을 하는 어떤 입자가 아니라 바로 ‘노동’이다. 이것이 사람의 형상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2)


교회에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피고용인을 착취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목사가 되기 이전에 한 고용인일 때에 피고용인과의 분쟁으로 노동부 소환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악의적인 경우 어떻게 고용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지도 잘 알고 있지만, 나 자신이 성경대로 이행했는지 다시 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착취가 이루어진다. 사실은 이 본문에서 가장 궁극적 착취의 현장이다.


교회에서 직원이 다쳤는데 단 1퍼센트의 치료비도 지원 않는 목사. (아마도 그는 6-7천의 연봉을 받는다.) 재해 처우에 관한 사회적 수준에도 못 미치는 교회에서 추수감사를 운운한다? 그건 뱀의 근성에 다름 아니다.


이 이사야서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성전)으로 기뻐하라고 했는데, 성서일과가 묶어 놓은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전혀 기쁘신 것 같지가 않다.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으니(21;5-19).


(3)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요즘 읽고 있는 Josephine Cutts의 <반 고흐>가 교차되었다. 그 중에서도 Man at Work (1883).


저자는 이 작품을 해석하기를 “자연과 녹아내리고 있는 남자”라고 하였는데, 그게 아니라 다른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만 고개를 숙이며 탄성을 자아내고 말았다. 고흐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풍경화 화풍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싱그러운 풍경들 일색이었는데(오늘날의 추수감사 축제처럼?), 그 중심에 이 소작인과 같은 인물들을 데려다 꽂고 있는 고흐의 폭로. 구체적으로 이 작품의 경우,


아아... 저 소작인의 허리 아래로 다리 굴곡을 보라.

특히 엉덩이로부터 무릎까지의 쌍스러울 정도의 붓 터치. 

저것은 그냥 굳어버린 ‘목조기계’인 것이다.

그는 멋진 낭만의 자연과 녹아내린 것이 아니라

그의 과업(Work)으로 녹아 땅에 붙박이가 되고 만 도상(圖像)인 것이다.

평생 흙을 갈아야 먹고 살 수 있는-.

그럼에도 땅이 말을 듣지 않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금년 추수감사절은 이 사실을 폭로한다. (폭로와 계시는 같은 말이다.)



(4)


새 하늘과 새 땅은 제1성전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 하늘과 땅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다가 또 새 하늘과 새 땅이 제2 성전에서 열렸다. 그러나 다시 그 하늘과 땅에 갇히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헐어버리신다. 그리고는 이 반복의 현장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의 프쉬케(soul)를 얻으라. 너의 인내로.” (눅 21:19)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인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인내가 프쉬케다)



에필로그 | 이리, 사자, BUT 뱀.


이 추수감사가 잔치인지 폭로인지 그 경계 때문에 이사야서 65:25의 “이리, 사자, 뱀,” 세 맹수/맹독류는 두 가지 번역을 낳는다.  “이리, 사자 AND 뱀”. 다른 하나는 “이리, 사자, But 뱀”. 후자가 뱀을 제외 시키는 번역이며, NRSV가 그렇게 번역하였다. 나는 NRSV를 지지한다.



 * 2013.11.17일자 | 새 하늘과 새 땅에 못 들어가는 한 가지 | 사 65:17-25. (cf. 사 12 or 시 118; 살후 3:6-13; 눅 21: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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