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에 해당되는 글 82건

  1. 2012.05.13 그 가지에 맺히는 열매는 무엇인가
  2. 2012.05.07 너희는 가지니
  3. 2012.04.30 버린 돌
  4. 2012.04.24 의인과 죄인의 상대성 원리
  5. 2012.04.18 무엇이 기쁜가, 무엇이 부끄러운가
말씀 속에서2012. 5. 1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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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세 개의 언어 

오늘은 퀴즈를 하나 낼까 합니다. 영어 잘 하는 제3세계(Africa) 학생 하나가 한국에 대학을 다니러 왔습니다. 인종차별 받는 그 외국인 학생은 얼마간 홀로 외롭게 지내다 친절한 한국인 학생 하나를 클래스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한국인 학생은 영어를 썩 잘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그 클래스에서는 이 외국인 친구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음식도 소개하고 근교 관광안내도 하고 무엇보다 둘은 항상 함께 앉아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클래스에 한국인 학생 한명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 새로 온 학생은 외국인 학생을 보자마자 말을 건네는 것이, 영어 수준이 장난 아닙니다. 그 외국인 역시 종전 학생과 대화 나누던 때와는 딴 판으로 명쾌한 소통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셋이 같이 있을 때면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둘 사이를 그는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셋이서는 절대 함께 대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세 사람에게는 세 종류의 언어가 존재했습니다. (1) 그 외국인과 영어 잘하는 학생과의 언어, (2) 그 외국인과 영어 잘 못하는 종전 학생과의 언어, 그리고 (3) 두 한국 학생들 간의 언어. 자 퀴즈 들어갑니다. 세 친구 중에 가장 소외당하는 친구는 누구일까요? 소외당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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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그 가지에 맺히는 열매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 자신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아버지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지는 항상 붙어 있어야만 하고 붙어서 열매 맺되, 열매 맺는 그 가지는 더 많이 열매 맺게 하시려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 가지의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열매>에 관한 비유는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분포되어 있지만 여기 요한복음 본문 구간에서의 열매는 그 열매 간의 관계에 대한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친구>인 것으로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고 많은 관계 중에 왜 하필 <친구> 관계를 열매로 지목 하셨을까요?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v. 15a).

본래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주인과 종-여기서는 죽여도 되는 종(dou,louj)을 말함-의 관계일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선조들이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 하는 것을 보고 “마치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더라”는 출애굽기 33장 11절, 그 최상의 관계를 실제로 실현하는 선언이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 하는 사이/관계 말입니다. 친구이기 때문에 대화 할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대화하는 그 자체가 마치 친구 같았다는 뜻입니다.

친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v. 15b).

부모도 나를 알고 형제도 나를 알고 선생님도 나를 아십니다. 그러나 친구가 ‘아는 것’은 좀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자들 보다 무심할 수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전자들보다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만이 갖는 그 남다른 ‘이해’가 좌우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나는 이해를 동반하는 관계여야 하는 것입니다.

친구로서 희생이 가장 큰 義(사랑)를 수립하기 때문입니다(v. 13).

본래는 창조주와 피조물, 주인과 종의 관계였던 것인데 높은 곳에 계신 분이 낮은 곳에 친히 내려 오셔서 그 독특한 열매 관계, 즉 <친구>가 되신 것은 그 희생이 높은 곳으로부터 억지로 된 파괴적 희생이 아니라 그 화목의 완성도를 지표 하는 겸손으로 이루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언어의 통일 

우리는 보통 사회적으로 세 가지 언어 형식, 곧 (1) 우등한 그룹 언어, (2) 열등한 그룹 언어, (3) 동등한 그룹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등한 그룹 언어는 때로는 우월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비굴하며, 열등한 그룹의 언어는 때로는 희생적이지만 무시하며, 동등한 그룹 언어는 무성의하기 십상입니다. 이 언어들의 통일이 바로 친구됨으로써 열매 맺음의 관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5월13일 부활주일 후 제6주
본문, 요 15: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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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5. 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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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접붙임

성서 가운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쓴 로마서라는 책에 보면 접붙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와 동지역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이방인들 보다 복음에 배타적인 것을 빗대어 참올리브 나무 격인 유대인을 견책하고, 이방인들은 접붙여진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로서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져서 열심히 열매를 맺으라? 그러나 일반적으로 접붙임의 경우에는 일부러 야생 올리브 열매를 얻으려하지 않는 한 참올리브 나무에다가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야생 올리브 나무에 참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입니다. 바울 선생이 잘 모르고 쓴 비유일까요?
접붙임이 성공을 하면 그 접붙인 부위 아랫부분은 기존 대목의 성질을 유지하고 그 접붙임 윗부분부터는 접붙인 가지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합니다. 즉, 배나무에다가 사과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배의 단맛을 지닌 사과가 열리고, 감나무에 개암나무 가지라는 것을 접붙이면 감 맛이 나는, 하지만 감보다는 크기가 작은 개암열매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원목이 어떤 나무냐가 아니라 가지가 어떤 가지냐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접붙임의 원리이며 여기에 우리 존재의 비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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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너희는 가지니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존 환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가릴만한 유전학적 선택권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출생한 원가지는 우월할 수도 있지만 열등할 수도 있습니다. 부유할 수도 있고 빈한할 수도 있고, 현명할 수도 있고 무지할 수도 있으며, 군자(君子)와도 같은 후덕한 원목을 자랑할 수도 있지만 실망스러움을 그 뿌리로 둘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유전학적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써 결정됩니다. 그 은사는 바로 나무가 아닌 그 나무의 ‘가지’로서 능력입니다(사 11:1, 10; 롬 15:12; 렘 23:5; 33:15).

예수로 접붙임 되십시오(롬 11:17).

우리는 예수님의 출생 지역과는 다른 이방인들이지만 그분께 접붙임 되어 구속사 안으로 들어와 구원을 획득했습니다. 구속사에 들어와야만 그 구속사의 진액이 흘러 구원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구속사는 본래 유대인들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대인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살지도 않았으며 그들 민족이 지닌 가치관과도 다른데 어떻게 구속사에 진입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은 상태 그대로 계십시오(요 15:4).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지 나무로부터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밖에 던져져 마르고, 마르면 불에 던져져 타버릴 뿐입니다. 나무에 붙은 가지는 붙었다 떼어졌다 하는 게 아니라 붙은 상태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상태입니까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까? 붙어 있다면 붙어있는 상태를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의(義)의 가지가 되십시오(요 15:3).

의의 가지가 됨으로써 그분께 붙어있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액 자체가 義이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우리는 ‘가지’ 그 자체 입니다(요 15:5).

배나무에 접붙인 사과나무 가지에 사과가 열리고, 감나무에 접붙인 개암나무 가지에 개암열매가 열리듯 그 가지에는 고유한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액을 통해 의로워졌지만 우리가 지닌 속성 곧, 우리 혈통의 계보는 우리 몸속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계보가 義의 가지 된 우리로 말미암아 황금가지(Golden Bough)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5월6일 부활주일 후 제5주
본문, 요 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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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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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슈퍼맨

어려서부터 공상과학 소설에 빠져 살던 두 친구가 만화를 만들었습니다. 글을 주로 쓴 친구는 주인공에게 자기처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입혔습니다. 좋아하는 여성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자기를 닮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초능력자입니다. 가슴에는 역삼각형의 S자를 새겨줬고, 악당들과 싸울 땐 더 멋져 보이라고 망토도 달아줬습니다. 그림을 맡은 친구가 모든 걸 멋지게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을 알아주는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번번이 퇴짜를 맞자 상심한 나머지 그림을 몽땅 찢어 불태우고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 하다가 Detective Comics라는 한 출판사 잡지를 통해 간신히 빛을 봅니다. 그 해가 1938년입니다. 처음에 이 회사 사장은 이 만화를 신통치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출판사가 이 만화를 표절하자 가치를 인지하면서 지면 할애를 늘렸고 평균 25만 달러였던 매출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그렇지만 원저자인 두 사람은 회당 500달러밖엔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주인공 캐릭터 저작권까지 같이 넘긴 바람에 훗날 이 캐릭터 가치가 엄청나게 상승했음에도 둘에게는 별 소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회사와 소송을 거듭하다 전 재산까지 날리게 됩니다. 후일 만화계의 설득으로 회사로부터 소정의 연금도 받고 책에 이름이 나올 정도로 명예도 회복되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캐릭터만큼 부를 거두진 못하고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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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렸던 친구 조 슈스터는 1992년 78번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고, 글을 썼던 친구 제리 시겔은 4년 후 LA에서 82세 나이로 그 뒤를 따릅니다. 이 만화책 주인공이 바로 슈퍼맨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슈퍼맨은 이들 자아가 담긴 원작 위 에 여러 사람의 갈망이 덧입혀진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린서플 | 버린 돌

누군가를 고대하는 대망(待望) 사상은 모든 민족이 지닌 보편적 사조입니다. 인도의 하누만 이야기를 리메이크 했던 중국의 서유기 주인공이 돌에서 태어난 것처럼 우리나라 동(東)부여의 왕 금와(金蛙)도 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판 손오공인 슈퍼맨마저 운석, 즉 돌을 기원으로 합니다. 서로 물리적 교류가 가능한 범위 내의 지역 문화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저히 교류가 불가능한 지역 간 문화 속에서도 이러한 사조가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그 대망에 응할 누군가가 실제로 정말 존재한다는 객관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돌이 “버려진 돌”이라는 역설로서 그 돌의 진위를 가려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입니다(행 4:11; 벧 2:7b; 시 118:22).

세상이 대망하는 돌은 최후에 가서는 사람들의 환호와 영광을 한 몸에 받는 돌이지만 이 돌은 최후의 순간까지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서 그 이야기가 완전히 종결됩니다. 그렇게 끝난 것을 하나님께서 땅 속으로부터 다시 꺼내 머릿돌로 쓰십니다. 

약속의 돌입니다(c.f. 창 28:18; 31:45).

다윗은 여느 왕들처럼 왕의 혈통에서 낳고 자라다가 등극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가 혁명을 통해 보좌에 올랐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울 왕과 사람들로부터 거부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다가 이스라엘을 통일해낸 인물입니다. 그의 고통이 시편 면면에 묻어나고 있으며 특히 118편 본문 속 <버린 돌>도 이때를 상징하는 시어(詩語)입니다. 이스라엘의 돌이 야곱의 베개였다면(창 28:11, 18) 그의 돌은 버려진 돌인 것입니다. 이 돌의 약속대로 대망의 예수께서 오셔서는 똑같이 <버린 돌>로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그를 거부 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그 돌이 머릿돌 된 집에 의(義)의 문이 달렸습니다(시 118:19-24).

다윗 자신이 그러한 삶을 통해 실제로 아들 솔로몬 성전의 머릿돌 역할을 한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대망하는 모든 민족의 머릿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로지 그가 머릿돌로 계신 하나님의 집에만 의의 문이 나 있으며, 반대로 의의 문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집이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머릿돌

다윗은 혈통도 혁명도 아닌 방법으로 왕에 등극한 특별한 인물이지만 통치 과정에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서 그의 종말, 그리고 빛바래 스러져 가는 후손들로 얼룩진 그의 가계를 볼 때 그는 버려진 돌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돌에 임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다시 숨을 쉬면서 모든 민족을 품는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2012년 4월 29일 부활 후 제4주
본문, 행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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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2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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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역지사지(易地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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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기돼지 삼형제>는 <일곱 마리 아기염소><빨간 모자>와 더불어 서구의 구전동화입니다. 이들을 비롯한 서구동화의 공통점 하나는 악(惡)은 언제나 늑대라는 사실입니다. 존 셰스카(Jon Scieszka)라는 사람이 이 늑대 입장을 대변하는 패러디를 책으로 냈습니다.

늑대가 할머니 생일에 쓸 케익을 만들다 설탕이 떨어져 아기 돼지들에게 빌리러 갔는데 감기가 걸려 재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그 집들이 날아가 버린 것이고, 집이 무너지면서 두 마리 돼지는 시체가 되었는데 고기는 그대로 두면 안되니깐 육식목(肉食目) 타고난 자기로서는 당연 그걸 먹을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돼지 집에 갔을 때는 할머니를 험담하는 그에게 흥분해 돼지 경찰들이 출동하는 소동이 빚어졌고 급기야 돼지들 신문에 “늑대는 포악한 동물”이라고 대서특필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식자들은 더러 존 셰스카의 이 재구성을 인용하여 “소통의 부재,” “나쁜 늑대(공공의 적)를 규정하는 집단의식”을 비판하면서 돼지들이 권력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견주어 작금의 우리 사회 단면을 보여준다는 논조의 적용을 하곤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옛날 중국의 하우와 후직이라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물에 빠진 이가 있으면 자기가 치수(治水)를 잘못해 그들을 빠지게 한 것이라 생각했고, 굶주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일을 잘못해 그들을 주리게 한 것이라 생각하여 세상이 비교적 태평한 시절인데도 자신에게 극단적 청빈을 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 성인들은 입을 모아 “이들은 각각 처지를 바꾼다 해도 모두 똑같이 하였을 것”이라고 칭찬했는데, 여기서 역지사지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결국 늑대는 역지사지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나쁜 늑대인 것입니다.

프린서플 | 義의 제사 

모든 상황(situation)에는 입장(position)이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선인(善人) 아니면 악인입니다. 누구나 반드시 선인이거나 악인입니다. 주로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에 대한 선인이며 그 누군가는 언제나 바로 나에 대한 악인입니다. 이러한 극단적 ‘입장’을 중재하고 아우르는 보편적 입장들을 묶어서 우리 사회는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법은 빈번하게 편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개정과 보완을 거듭해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드려지는 제사, 즉 예배를 그 움직일 수 없는 법으로 제정하셨습니다. 그 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움직이지 않는 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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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회개입니다(행 3:12-19).

예수님 부활․승천 후 초기의 주된 회개로의 촉구는 예수라 하는 청년을 몰라봤던 사건 그 자체에 대한 책망이었던 것으로 사료 됩니다(행 3:13-17; 9:5). 그러나 그것은 점차 “모른다”라고 하는 인간이 지닌 그 행태 자체에 대한 책망으로 확진 받게 됩니다(c.f. 롬 1:18-32). 우리는 “예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사적으로 문외 할 수는 있지만, 그 무지의 근본은 바로 “고의적으로 모르는 상태,” 즉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지닌 그 근성이 회개의 대상인 것입니다.

둘째, 책망할 것이 없음 입니다(요일 3:16-24).

고의적으로 모르는 상태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과 회개만이 바로 제사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그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제사는 오로지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교리적 강제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 분만이 그 모든 만사가 지닌 상황과 입장을 일소할 수 있는 의(義)의 키를 쥐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부터 그 열쇠를 받았을 때에 우리는 책망함이 없어질 정도의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 義의 제사입니다(시 4:1-8).

본문은 의의 제사를 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축성되거나 유지될 수 있는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그 의의 키를 갖고 계신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만이 유지될 수 있는 법입니다.


에필로그 | 의인과 죄인의 상대성 원리 

결과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에 대항 된 선인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항 된 죄인일 수 있다는 겸손함 속에서 우리를 불의로부터 구별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세우고 나아가신 의의 제사 형식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2012년 4월 22일 부활 후 제3주
본문, 시편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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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1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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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福音, 곧 Good News입니다. 무엇이 좋은가요? 왜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 건가요?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에 기쁘다고 했을 텐데 기쁨이 된 그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을 기뻐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뭔가 만족을 느낄 때인데 그 만족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혹 무형으로는 명예나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거추장스러워 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기독교 인식이 부정적인 시기에는 더더욱 복음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는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서 그 복음 자체는 부끄러워하는 이율배반적인 퇴행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슬로건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데 나는 그런 식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취지에서 우리는 이 슬로건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음이 갖는 전제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부끄러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끄럽다는 것은 아직 그 소식을 못들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과 실라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간수가 이들을 데려다가 치료해주고 음식 차려주고 세례 받고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합니다. 무엇이 기뻤을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v. 31) 하더니, 정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구원 받은 확신이 들었기에 기뻤던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인가요? 사람? 물건? 명예? 권력으로의 구원? 

아닙니다.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즉 복음을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복음이 누군가에게 전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것의 반증입니다. 그것은 또한 “기쁘지 않다” 의 반증입니다. 그리고 기쁘지 않다는 것은 기뻐보지 못한 것의 반증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그는 한번도 구원에 이르러 본 경험이 없다라는 결론에까지 도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각하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미문(美門)교회 수요 예배
2012년 4월 18일 부활절 후 2nd
본문, 행 1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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