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에 해당되는 글 82건

  1. 2012.07.30 믿음의 크기에 관하여
  2. 2012.07.23 그리스도들인이 세우는 세 가지 담
  3. 2012.07.16 야웨의 궤(櫃)의 행방 1
  4. 2012.07.09 두 종류의 믿음, 절망과 희망
  5. 2012.07.02 첫 수확의 질료
말씀 속에서2012. 7. 30.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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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공(空) 


공(空), “비었다”고 하는 이 글자의 뜻이 지닌 형식은 그 자체가 태생적으로 부정적 입니다. 강력한 부정을 구사합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이고도 가치론적인 그 모든 술어와 속성을 부정하는 말로서 일상에서는 덧없음의 형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인도 철학은 이미 이 부정어를 통해 비로소 그 술어들과 속성이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 존재의 방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 말로 슌야(śūnya), 즉 부풀어 그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 개념은 사실 사람이 실제로 입증할 수 없는 개념이었지만 인도 수학은 제로(0)라는 수의 이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특히 그것은 부정을 통한 긍정 혹은 상대를 부정함으로 절대 직관을 의도하려는 일단의 ‘종교’로 설파되기도 했습니다. 이 <공>을 이(理)로 번역하는 학풍이 있는데 그것을 void(공허)가 아닌 absolute(절대)로도 번역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 일면으로까지 파급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 악을 규정할 때 바로 이 <공> 즉, 모든 무적(無的)인 것을 - 모든 ‘없다’는 개념을 - 악으로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없는 곳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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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빈 공간(空)에 관한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니체는 이 ‘비어있음’을 가능성이라고 가르침으로 적극적으로 허무를 향해 파고들었고, 프로이트는 그 ‘공’이라는 표현 대신에 ‘욕구’라는 말을 써서 마치 이 세계가 욕구라는 충동이 만들어 낸 공간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 공백과 실존 세계의 연관성을 밝혀내는데 종사한 면이 있지만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공간을 통해 오직 믿음을 산출해야 합니다.

프린서플 | 믿음의 크기에 관하여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 공간을 인위적으로 채워서는 안됩니다. 성서는 이 빈 공간의 용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자리로만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공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공간이지 자기 믿음을 채우는 공간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이 공간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로서 명확하게 존재하는 장소인 동시에 그 크기를 다음과 같이 잴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너비 입니다.

공간 구성을 할 때 너비라고 하는 요소는 “많다”도 “넓다”도 아닌 개념이지만 (믿음에 관한한) 차라리 후자에 가깝습니다. 너비는 넓음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적어도 많음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비는 <결신>과도 같은 속성으로 제안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야웨의 궤에 관심하여 결국에는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다짐, 이것이 바로 너비에 해당하는 믿음의 형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결신도 없다면 그것은 공간의 가장 기본 단위인 너비가 확보되지 않은 것과도 같습니다.

둘째, 믿음의 길이입니다.

길이는 그 공간(입체)이 갖는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단위에 해당합니다. 그렇기에 이 길이라는 단위는 너비와는 달리 시간 개념과도 연관을 맺는 것입니다. 시간 개념은 믿음의 속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위입니다. 시간적 요소가 - 오래 참음과 같은 - 결여된 믿음은 아예 그 기본 기능으로부터 실격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생에 필적들이 있었습니다. 사울, 그리고 압살롬,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면서 결국에는 길이를 모두 채우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입니다.

셋째, 믿음의 높이입니다.

사실 높이와 깊이는 같은 개념인데 본문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여 공간의 단위로 산입하고 있습니다. 높이가 깊이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적으로는 같을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단적으로 그 차이를 가르는 예는, 한 마디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는 그 높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로는 자기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믿음의 깊이입니다.

반면 깊이의 예는 이것입니다. 제 아무리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이 큰 자식도 부모가 자식을 헤아리는 만큼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고 헤아린다고는 하지만 그 분이 우리를 헤아리는 것을 넘지는 못합니다. 이때에 깊이라는 단위를 씁니다. 또 다윗의 경우 비교적 여유로운 시절이 찾아왔을 때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는 그 후속 조치로 일련의 계략을 펼칩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밧세바와 그 남편이 동침케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깊이>는 야웨의 궤를 전장 야전에 두고 집안에서 아내와 안락하게 지낼 수 없다는 우리아의 <깊이>에 지고 맙니다.


에필로그 | 유일한 그 공간의 용도

이와 같은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를 잴 수 있습니다. 이 때 여기서 쓰이는 메코스(길이), 플라토스(너비), 휘포스(높이)는 바로 노아의 방주의 크기를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사용되었던 단위입니다.

파스칼의 표현인 바, 이 공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자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헛된 ‘가능성’과 ‘욕구’를 채우려다가 종국에는 파멸을 맞으며,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자기 믿음’으로 그곳을 메우려는 이들은 후일에 그것이 ‘욕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29일 성령강림 후 제9주
본문, 엡 3:14-21.
 (c.f. 삼상 11:1-15; 시 14; 요 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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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2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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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만리장성  

B.C 246경 중국에 영정이라는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섭정을 받던 그는 장성한 후 섭정 무리를 척결하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여 천하통일을 꾀합니다. 우선 가장 약한 한나라부터 멸망시켰습니다. 다음 조나라(228년), 위(225), 초(223), 연(222), 그리고 제나라까지(221), 마침내 39세 나이로 중국을 통일합니다.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삼황오제라는 말에서 ‘황’과‘'제’를 따 황제라 칭하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가 바로 진시황입니다. 그는 아방궁을 위시한 무리한 토목공사 강행과 대규모 문화탄압사건(분서갱유)으로 중국 사상 최대 폭군으로 불리지만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2천년 왕조의 기본틀을 닦은 인물입니다. 만리장성도 유명합니다. 그가 150만 여명을 동원 시킨 이 공사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긴 성벽을 대체 왜 축성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북방 흉노의 침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성이 실제 그들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불노초를 찾아 헤맨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불과 49세로 죽습니다. 사실 그 보다 평균 두 배는 더 사는 우리들은 그가 볼 때 불노초 먹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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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그리스도인들이 세우는 세 가지 담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허물려고 했던 - 이미 허무셨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여전히 존재하는 - 담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천국과 지옥 사이의 담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관념적 장소가 아니라 육체와 관념 모두로써 인식되는 곳입니다. 특히 천국은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궁극적 귀착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들어갈 수 있고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너희가 가는 천국이라면 함께 가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천국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슬람의 천상계는 살아생전 공로 있는 남성들의 경우 - 예를 들면 종교적 열심의 자살 테러 - 원하는 만큼의 여성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여성들은 그런 천국엔 안가려 할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이 여전히 담이 쳐져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행동 양식과 그에 따른 천국의 설명일 것입니다.

둘째, 교리라는 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만히 덕을 쌓고만 있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그분의 행실과 태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세례(침례)가 그것입니다. 성만찬이 그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은 세례와 성만찬을 위해 가는 곳이지 다른 이유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교리 말고 다른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 교리는 의식과 예전이라는 미명 아래 교파적 교리보다 부차적 수준으로 격하되어 단지 천국으로 가는 일종의 수속으로 자리해 있거나, 성장 테크닉에 가려 있습니다. 담을 형성하는 교파적 교리나 성장 기술 프로그램은 본문에서 지탄하고 있는 ‘손으로 행하는 할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어떤 유명한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보고는 “저 목사가 나를 장로교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그곳에 안갔다고 일기에 기록합니다. 프랭클린이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셋째, 빈곤이라는 담입니다.

배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은 빈곤으로부터의 구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곤을 안 느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요즘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적 빈곤> 퇴치를 사역기치로 하는 한 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떡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떡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적 빈곤의 퇴치를 위해서는 무모하리만큼 도전하려고 하지만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나설 마음은 없습니다.
<상대적 빈곤>에 처해있는 자들의 빈곤 문제를 배부른 자들의 나약해 빠진 푸념 정도로 간주하는 것은 그릇된 진단이라는 입장이 저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 빈곤은 전적으로 상대적 가치가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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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상대와 상대 사이의 ‘담’을 주도하며,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절대빈곤에까지도 맹위를 떨치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빈곤’ 그 자체보다도 선행된 악을 우리는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가 바로 본문에서 지목하는 ‘담’입니다. 십자가가 허물고 평화를 세우려 했던 것도 이 벽들이며, 이 벽이 또한 그것을 도리어 방해하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담을 허무는 방법 

우선 진시황이 친 벽인 만리장성을 칭기즈 칸이 허물 때에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벽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서 큰 가마솥에 기름을 끓이고는 포로들을 그곳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이 그것을 보고 겁먹는 바람에 사기가 꺾여 그 담이 붕괴되었다는 얘기 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군대는 공병의 공성전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리 높고 강한 성벽도 그 곁에다가 같은 높이로 공성을 하여서는 거기서 상대 성벽 담을 공략하는 전법이었습니다.  
 
끝으로 본문의 저자 바울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가정으로’ 제국들과 모든 세계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종교로’ 담을 허문 게 아닙니다. ‘가정으로’ 허문 것입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에는 당시의 하우스쳐취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명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되지도 않은 가정이 로마제국의 담을 넘어선 좋은 예입니다. 로마제국뿐 아니라 진시황과 칭기즈칸의 나라들은 바울의 그것보다 결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가정’으로 담을 붕괴시켰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미문(美門)교회가 하우스쳐취라서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22일 성령강림 후 제8주
본문, 엡 2:11-22.
 (c.f. 삼하 7:1-14a; 시 89:20-37; 막 6:30-34, 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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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1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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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

1981년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가 발표된 이후 성궤의 실존에 관심이 고조된 적이 되었습니다. 이미 1913년 성궤를 찾아 떠난 고고학자가 존재했던 사실이 이 영화로 재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료 속에서 “성궤는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옮겨졌다”는 단서를 잡고 카이로에 거처를 잡은 그는 기록을 탐독하던 중 성궤 운반 시간대를 대조해 “성스러운 금괴는 시오니 제국(현재 에티오피아)으로 옮겨졌다”는 문장을 찾아내 에티오피아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친구에게 보낸 1919년9월13일자 편지를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됩니다. 친구는 그를 찾아 에티오피아까지 와서 ‘악섬’이라는 지역에서 에티오피아 정규군 복장이 아닌 이상한 복장에 창을 든 경비병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악섬의 지도자로부터 “네 친구는 성스러운 곳을 들어갔다가 천벌을 받아 죽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친구의 시신 수습을 위해 한 지하교회를 찾아갔다가 그곳서 ‘천벌을 받아 죽었다’는 수많은 유골들과 함께 구부린 채 죽어있던 자기 친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솔로몬 왕으로부터 위임 받았던 성궤가 악섬의 20여개의 지하교회들 중 어딘가 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비밀을 전해 듣게 됩니다. 여러 분은 이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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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야웨의 궤(櫃)   

본문에서는 다윗이 매우 위험천만한 일 하나를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지금까지 모든 신앙의 초점이었던 ‘하나님의 궤’를 특정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 도중에 그만 웃사라는 사람이 부주의로 죽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이 성궤에 얽힌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성궤(법궤)를 중심한 신앙은 터부인가 믿음인가.

성궤는 요단강 강물을 끊는 능력이 있었습니다(수 3:13). 뿐만 아니라 여리고라는 철옹성을 함락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수 6:16). 그리고 엘리 제사장 말기에 가서는 이 성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적이 있는데, 당시 성궤 스스로가 그들의 우상의 머리와 손목을 끊고 그 스스로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기이한 힘을 보여준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롭고 신성한 힘의 근원이 과연 터부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믿음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이것이 이 본문이 갖는 핵심입니다.

둘째, 성궤로 인한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시점은 언제인가. 

성궤를 이동 시키다가 발생한 불상사로 겁을 먹은 다윗은 그것을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두게 했습니다. 오벧에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을까? 웃사는 만졌기 때문에 저주 받았고 오벧에돔 은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복 받은 것일까? 웃사는 단지 뛰는 소 때문에 궤가 떨어질까 봐 붙든 것뿐인데 왜 그는 죽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을까? 물론 ‘웃사는 죄 있었고 오벧에돔에게는 없었고’ 라는 식이면 그만이겠지만, 오히려 오벧에돔이 정통 레위지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관심해야 할 중요점은, 하나님께서 성궤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전혀 저주가 없었고 도리어 복 받은 것으로 타인의 이목에도 띄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오벧에돔 집에 머무는 동안 성궤에 대한 터부가 해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터부의 완전한 해제는 다윗이 그 궤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춤 춰도 (웃사처럼) 급사하지 않는 담대함의 예배로 드러납니다. 이를 질타하는 미갈이 오히려 터부에 걸립니다. 그리고 다윗의 그 시도적인 찬양과 오벧에돔의 직책이 다름 아닌 찬양이었다는 사실은 이 성궤의 터부 해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예배가 갖는 의미입니다.

셋째, 성궤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가.

오벧에돔이 석 달간 받은 복은 석 달로만 끝나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롯 왕이 에돔의 자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 복은 나름대로 유구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복이 복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지 아니면 새로운 터부로 재생산 되는 지, 그 지점에 성궤의 행방이 감춰져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받아낸 약속의 영원함, 곧 성궤의 행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 어디에도 없다는 어디에든지 있다

성궤는 영어로 the Ark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Ark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에덴동산도 일종의 Ark였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Ark일 수 있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의 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에덴동산도 성전도, 예수님의 육체도 또 그의 무덤도, 그리고 성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어디든지 있다는 개념으로 치환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흑암 속에서 빛으로 틈을 벌린 이 지구도 일종의 알, 즉 Ark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구를 성궤로 인정하지 않는 이치에서 그 성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15일 성령강림 후 제7주
본문, 삼상 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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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9.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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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마지막 잎새

워싱턴 광장 옆 그리치니라는 주택가는 집값이 싸 화가 촌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어느 해 겨울 그곳에 폐렴이 나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몸 쇠약한 화가 존지도 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쇠잔한 그녀는 창밖의 담쟁이를 바라보며 그 잎들이 모두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도 꺼져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말을 그녀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친구 수우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병간호 하느라 의뢰받은 그림을 기간 내에 그릴 수 없던 차 수우는 아래층 화가 노인 베어먼을 모델로 청하면서 그에게 존지 이야기를 건넵니다. 명색만 화가였지 별 볼일 없는 그 노인 역시 병약한 그녀의 망상을 꾸짖습니다.
단풍잎들이 하루하루 떨어져 드디어 마지막 한 개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병마와 싸우는 마지막 고비의 긴 밤을 넘긴 존지는 다음 날 밖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전히 한 개만은 지지 않고 있던 것입니다. 곧이어 베어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풍잎이 질 것이라고 말한 그날 그가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담벼락에 잎을 그려놓았던 사실도 알게 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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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두 종류의 믿음

반도(半島) 특성상 1,000여 회에 가까운 외세침입을 받아 왔던 우리나라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 역시 바람 잘 날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크게 다섯 제국으로부터 - 앗수르 제국(지금의 이라크 북쪽지역), 바벨론 제국(이라크 남부), 페르시아(이란), 헬라(희랍 중심), 그리고 로마 제국 - 침탈을 겪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시도했던 문화 삭제의 잔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성서적 이스라엘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성서만큼 미치지 못하는 현상은 그들의 오랜 침탈 기간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역사에서 삭제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던 그들을 다시 살려낸 건 어디까지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상황 속에서 믿음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희망’이라는 형식입니다.

패망하여 나라도, 가정도, 성전도 모두 파괴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무산되어 버렸는데도 몇몇은 그 상황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들이 진정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를 거듭 묵상하고, 또 그 묵상을 통해 반성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 즉 ‘희망’을 발견하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둘째는 ‘절망’이라는 형식입니다.

모두가 희망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쇠락해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낙엽의 개수를 세는 듯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마치 그 잎새들, 특히 마지막 잎새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마음에 깃들지만 명확하게도 그것은 ‘절망’입니다. 저 잎들이 다 떨어져버리고 나면 “난 더 이상 살지 않겠노라.”는 <시한부 신념>을 기저로 갖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체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시한이 지나면 산화해버리고 맙니다.

셋째, ‘없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깨뜨리거나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며, 녹이거나 불처럼 끌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없어질 것’들은 애당초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에필로그 | 절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이 아닌 희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으로 

우리나라가 이 시대에 쓰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믿음을 보신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또한 여러 번 없어졌던 나라였는데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은 다 그 믿음의 덕택입니다. 많던 잎사귀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하나, 둘..., 사라져갔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바울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믿음이 여전히 우리 속에서 살아 숨 쉽니다. 이 믿음의 형식에서 바로 영생의 개념이 산출된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 후 제6주
본문, 고후 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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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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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물, 흙, 불, 바람

미문(美門)이 열린지 3개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지는 1년. 맥추(麥湫)로서 미문의 첫 수확은 무엇인가. 햇빛 작렬하는 베란다에 가두어 둔 바람에 거의 다 타죽은 꽃식물들에게 새로운 흙과 물을 넣어주고, 유독 가장 큰 화상을 입은 녀석이 살아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이 지대한 태도의 변화가 아무래도 첫 수확이다. 베란다에만 놔두면 11월까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꽃집 남자’ 말만 믿고 (꽃집여자 아닌 꽃집남자였음) 그대로 했던 생명에 대한 무지스러움이나, 식물을 ‘사왔다’는 사실만으로 생명에 대한 관심이라 여겼던 이 잔인한 도시적 관념이나...

생명은 물, 흙, 불, 바람으로만 지탱된다. 온 만인이 알고 있는 진리를 나는 이제서야 알았다. 특별히 물, 흙, 불만으로는 안되고 <바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화상 입은 식물들을 통해 알았다. 바람은 <하나님의 영>이다. 천지창조 때에 땅을 드러냈고, 홍수로 가득해진 물들을 그 <바람>이 다 뽑아내었고, 그리고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실 때에 그 입에서 뿜어 나오신 그 <바람>.

다 타버린 식물은 버려야 하는데 막연한 믿음에 새 흙에 꽂고, 물을 주고, 창문으로 막지 않은 태양의 불을 쪼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람을 기다린다. 내 막연한 기대는 오그라든 잎사귀가 펴지고, 쪼그라든 꽃잎과 그 꽃의 색채까지 되살아나길 바랐는데... 그건 아니었다.

오그라들고 쪼그라든 색채는 그냥 그대로 질료로 산화되며, 오직 새 잎이 뚫고 나온다. 살아 있는 줄기 기둥으로 녹색이 서서히, 도무지 언제 그렇게 녹색이 밀고 올아 오는 지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하루가 다르게, 새롭다.

앙상하게 살아남을 것만 같다. 풍성하진 않고 앙상한 몇 줄기만 그냥 살아있게 될 것 같다.

물, 흙, 불들만으로는 안되고 바람으로.
이 4개의 원소 외에 하나 더. 우리의 스티그마. 상처.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엠페도클레스가 했던 그 말은 지당한 것이라고.

“우리는 흙을 통해 흙을, 물을 통해 물을, 공기를 통해 신성한 공기를, 불을 통해 파괴적인 불을, 그리고 미움을 통해 쓰라린 미움을 본다”

이것이 미문(美門)의 첫 맥추(麥湫)...

네 명 가족 외에 네 분 정도와 함께 예배드리고 있으니 이것이 단연 맥추이나, 그것은 내가 가장 혐오스러워 하는 단어 <배가>내지 <절대배가>라는 인수로 표명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기에 식물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관심으로 대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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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첫 수확의 질료  

맥추(麥湫)를 직역하면 “보리가 다 익었다”는 뜻입니다. 쌀이 아닌 보리와 밀이 주요 곡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 맥추는 추수감사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각 나라로 번역되어 나가면서 각 나라의 계절과 상황에 비추어 다소 재구성 된 면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는 자기들의 조상 청교도들이 미 대륙을 밟은 후 농사를 지어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던 시기로(11월 셋째 주일 정도) 자리합니다. 사계가 뚜렷한 우리나라에는 이미 의미상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민속명절(중추절)이 가을 초입에 있다 보니 같은 계절 끝자락에 위치한 이 절기의 안착에 큰 무리가 없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닥치기 전 먹을거리에 관한 감사와 기념은 ‘수확’ 보다는 ‘수장’의 감사와 더 깊은 연관을 맺습니다. 전통에 입각한 맥추의 의미는 “첫 수확”이라는 데에 더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세계 교회력에서는 맥추가 오순절로서 오순절이 성령강림절로서 그 의미가 정형된 상태이지만 약속 받은 그 지점에서 맞게 되는 첫 수확은 무엇인가- 라는 절기에 담긴 기본 의미는 잊어버려서는 안 될 신앙의 거점입니다.

첫째, 첫 수확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수확’이 의미하는 바는 ‘먹는다,’ ‘배부르다,’ 혹은 ‘맛있다’라는 의미로서 보다는 ‘살았다,’ ‘살 수 있다,’ ‘살게 되었다,’ 즉 생명으로서 의미입니다. ‘먹는다,’ ‘배부르다,’ ‘맛있다’라는 그 모든 의미는 생명이라는 의미로 귀속 됩니다.

둘째, 첫 수확은 무엇으로 자라납니까?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모든 유기체의 생명은 밧데리나 전기와 같은 인공 에너지로 생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연 에너지로만 생장합니다. 우리 일구어낸 수확은 결코 인공 에너지로 자란 것이 아닙니다.

셋째, 첫 수확은 과거를 치유하는 새로움입니다.

무에서 유로서 창조는 일회로 끝이 났습니다. 그 이후의 창조, 즉 새로움은 회복, 복원으로서 새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확’ 역시 우리의 과거와 어떠한 긴밀한 관계를 맺는가에 그 새로움의 질이 달려있다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첫 장에 시작되는 다윗의 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필로그 | 다윗의 첫 수확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삼하 1:19-27)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1일 성령강림 후 제5주/ 맥추감사주일
본문, 고후 8: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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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