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6. 2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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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4전5기

70-80년대에는 권투가 정말 인기가 많았습니다. 세계타이틀이 걸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빠들은 일찍 집에 들어오시거나 늦게 늦게 아예 밤새고 오시거나-ㅎ. 2002년 월드컵 당시 열기가 엄청났다고들 하는데 옛날엔 큰 경기 있는 주말엔 항상 그렇게 열기가 넘쳤습니다. 1977년 TBC라는 방송국에서 대단한 경기가 열렸습니다. 우리나라 홍수환 선수와 카라스키야 라는 선수의 경기입니다. 괴물로 알려진 카라스키야의 무쇠펀치는 예상대로 홍수환 선수 얼굴을 때렸고 연거푸 다운되었습니다. 너무 쓰러진 나머지 이젠 주심이 선수의 눈을 보며 그 의지를 읽어 경기를 이어갑니다. 2라운드에 가서는 무려 네 번이나 쓰러집니다. 3라운드가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홍수환 선수가 상대를 무섭게 몰아쳐 로프로 몰아가더니 비스듬히 누워있는 상대 선수의 턱에 강력한 펀치 한방을 날려 다운을 시킵니다. 경기는 끝났고 홍수환 선수는 다시 세계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카라스키야 선수가 더 셌는데도 불구하고 운이 없어 졌다고 기억하지 않습니다. 홍수환 선수가 4번 쓰러졌다가 5번째에 이겼다는 사실 그 하나만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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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방법

어떤 성서신학 학자는 예수님의 기적(이적)들을 몇 가지 형태로 분류를 해놓았습니다. 치유기적, 귀신축출 기적, 규범 기적(penal miracle), 선물 기적, 구조 기적, 현현 기적, 자연 기적 하는 식입니다. 이 모든 기적은 오늘날 이 시대에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누구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음 사항들을 유념합시다.

첫째, 하나님의 기적은 과학이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기적들이 기적인 이유는 자연과학의 법칙을 초월한다는데 그 전제가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일반적인 자연현상은 기적으로 분류하질 않으며, 과학/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주로 기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과학이 그 전제의 노릇을 하는 까닭에 그 기적 자체보다는 그 과학적 사고가 기적을 주도하고 있다는 모순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기적은 그 모든 사상과 이론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과학만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성과 사상과 이론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된 그 진정한 기적을 만났을 때에는 과학적 상식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이성과 사상으로서 그 모든 체계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기적에는 보편성과 개연성이 있습니다.

만약 큰 중병이 걸린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가만히 누워 있다가 느닷없이 낫게 된 것을 치유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떤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 느닷없이 복권에 당첨된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울부짖는 자가 하나님의 기적을 만나는 것이며, 그 간절한 그 무엇들을 우리는 ‘보편성’과 ‘개연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기적은 쑈가 아닌 과정으로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간구의 과정에서 보편타당한 그 은택을 누렸다면 그 기적은 하나의 ‘초월 현상’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은택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구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데에 본질이 있습니다. 쑈로서 존재하는 그 모든 기적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단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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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자라나는 씨 속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던 능력이

본문 구간에는 세 가지 기적이 잇달아 나옵니다. (1) 자라나는 씨, (2) 겨자씨 (3)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심. 저 성서신학 학자는 그 ‘자연 기적’ 분류 속에 (1)항과 (2)항은 분류해 넣고 있지 않으나,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질료와 형식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질료와 형식의 실현은 4전5기와 같은 꾸준함과 기다림을 자양분 삼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 24일 성령강림 후 제4주
본문, 막 4: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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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6. 1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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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프로메테우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조물주를 만나봐야겠어. 만들어 놓고 대체 왜 파괴하려는지...,” 

이런 반신(反神)적 다이얼로그에 기인해 반기독교 이야기로 규정받기도 하지만, 그 말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 환경들로부터 우리 인간들이 들어야 하는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낼 수 없는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으로써 상당부분 파괴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파괴는 물과 공기와 토양뿐 아니라 생명 패턴에까지도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이미 그들의 조물주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름 짓는 권능이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모든 언어의 궁극점인 ‘이름,’ 즉 그 존재들이 사는 집(세계)인 그 ‘이름’을 짓는 능력은 이미 조물주에 상응한 권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로써 단지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는 행위에서 그 깊으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며(시 92:5), 반면 “왜 만들어 놓고 파괴하려느냐”라는 어떤 이들의 소리를 통해서는 그 얄팍한 마음 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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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만들어 놓고 파괴하는 분이 아니라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역사 모델로 합니다. 한 가정으로 출발해 국가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쇠락과 패망의 역사과정뿐 아니라 그 너머에 재건에까지 이르는 흥망성쇠의 장구한 ‘반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파동맹에서 왕정 단계로 들어서는 대목은 그 역사를 감싸고 계시는 하나님 손길의 의도를 읽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청원 할 때 청원의 직접 대상은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고 하나님은 최종 결정권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의 제도를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최고 실력자였던 사무엘이 자신의 일가가 누리는 절대 지위를 놓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태도는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듭니다. 왕의 청원을 반려하고 싶어 하면서도 왕을 엄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제도를 ‘기피한다,’ ‘선호한다’라는 관점 보다는 백성들이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항상 새로운 기대를 놓지 않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그분의 속성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0:24; 11:14).

왕의 제도를 반대했기에 이후에 쳐다보지도 않으셨던 게 아니라 합당한 인물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도록 엄선하시고, 그리고 기쁨으로 그 환경을 새롭게 열어주십니다. 왕이 되기 전의 사울은 수줍을 정도의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된 이후 그 위치를 감당하기에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그만한 리더가 없을 것입니다. 체격과 그리고 용맹함, 그는 전사답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습니다.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난 건 어디까지나 신앙적 문제 때문입니다.

다윗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5:34-16:1).

사울이 지도자로서 실격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왕의 제도 자체를 둘러엎으시고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제도/환경이 될 수 있도록 일하십니다. 사무엘은 다윗이 소년일 때에 기름을 부어 예비시킵니다. 다윗은 시상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깊은 시상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중요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미완의 삶으로 다음 세대를 맞습니다.

솔로몬을 세워주셨습니다(삼하 12:25).

솔로몬의 왕 됨은 자연스런 ‘세습’ 같지만 많은 역경을 거쳐서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력 이전에, 앞서 모든 왕들에게 그러했듯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그 어떤 한 부분이 그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왕이 된 후 재물과 복수가 아닌 지혜를 구하는 한 장면으로 압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여디디아, 그는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도 쇠락을 걷습니다.


에필로그 | 새로움의 하나님

이는 ‘모든 인생은 쇠락할 수밖에 없구나’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1) 이미 예고된 왕의 제도가 지닌 속성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새로움/회복을 노력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3) 우리 자신의 장점을 쇠락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언제나 그 새로움을 파괴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파괴를 일삼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 후 제3주
본문, 고후 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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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6. 4.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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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약 800년 가까이 보전돼 온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것이 보관된 곳 바닥에는 숯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숯의 유익함을 선조들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숯 효과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산화 방지와 환원 작용입니다. 사물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힘/복원력이 뛰어나 주위 사물을 활성화 하는 이 숯은 산성 물질이나 식품을 알칼리화 합니다. 또한 인체 체액이나 혈액을 알칼리화 시켜 신선하게 유지해 주고, 식용 숯을 먹으면 산을 중화/해독하여 장내 세균을 죽이고 유효균을 활성화 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 전자파차단 효과, 원적외선과 음이온 방출, 그리고 팔만대장경 주 보본기능인 습도 조절부터 곰팡이 방지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유용함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 생활 속 보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무를 숯가마에 넣어 구워 검은 덩어리로 재가 되기 이전의 탄소덩어리를 우리는 숯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말로 신선하고 힘이 좋다는 뜻을 가지며 영어로는 Charcoal, 즉 China(중국)와 cool(좋다)의 합성어로서 중국에서 약으로 들여온 숯을 서구에서도 복용해보니 좋아져서 그런 단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부정한 입을 향해 탄식하자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그 입술에 숯(불)을 가져다 대 정화시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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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숯불과 성령 

컴퓨터가 한 과업을 수행하려면 뭔가 입력할 장치가 필요합니다. 키보드, 마우스, 스캐너, 웹캠, 그래픽스 태블릿, 라이트펜 등이 그럴 때 쓰는 입력장치들 입니다. 그리고 그 과업을 결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대로 출력장치가 꼭 필요합니다. 모니터, 스피커, 프린터, 기타 컨트롤러(로봇) 따위 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입력장치들이 있습니다.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들로서 이들을 관장하는 기관들이 있고 그 가운데서도 눈과 귀와 입의 능력은 가장 탁월합니다. 눈․귀는 주로 입력을 담당하고 입은 출력을 겸합니다. 이들 셋은 특별히 마음(noun)에 직결로 달라붙어 있어 입출력 정보를 아주 빠른 속도로 운반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 셋 중에서도 출력 장치 격인 ‘입’을 놓고 깊은 탄식 속에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사실은 입을 통해서만 나머지 두 기관의 통제까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순서에 의해 그렇습니다.

입이 곧 마음입니다(마 12:34; 약 3:2-6).

귀는 마음에 있는 내용을 출력할 수 없습니다. 눈도 그렇습니다. 오로지 입만 그 내용을 그대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없는 것은 입으로도 운반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마 12:34b). 입이라는 지체를 가리켜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에 비유하는 야고보는 그 작은 것이 온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인생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약 3:2-6). 손과 발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은 마음 그 자신이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입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반증입니다.

입에 있는 말을 고치면 마음이 고쳐집니다(사 6:7b).

이사야 선지자는 영광이 충만한 성전 앞에 서자 가장 먼저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것은 사실 이사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영광을 본 자가 그 입술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성령께서는 그분의 말(Logos)을 통해서 그 마음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치면 잘 들리고, 잘 보입니다(행 2:1-42).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단단하면 아예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게 됩니다. 들리지도 않고 볼 수도 없게 되면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즉, 모든 입력 장치가 먹통이 된 상태인 것입니다. 마음을 고치면 잘 들리고 보이게 되며, 또 이해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에필로그 |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입이라는 이 신비로운 지체는 이와 같이 망가진 마음의 내용을 운반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귀와 눈을 고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향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통로를 집도(執刀)하시고 정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숯불, 곧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3일 성령강림 후 제1주
본문, 사 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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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5. 28.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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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홉스는 그의 역작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일종의 인공적 인간(人工的 人間)으로 간주하고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⑴ 국가의 주권은 인공 혼으로 전신에 생명과 운동을 공급한다.
⑵ 장관이나 행정관리는 인공 관절이고,
⑶ 보수와 체벌은 신경이며,
⑷ 개별 가정과 재산은 체력이고,
⑸ 복지는 그 인공적 인간의 과업이다.
그리고 ⑹ 원로들은 인공인간의 기억과도 같으며,
⑺ 형평과 법은 인공적 이성과 의지요,
⑻ 평화는 건강, ⑼ 소요는 질병, ⑽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⑾ 이 모든 것을 결합하고 창출하는 신약(信約)은 이른 바 창세에 신이 말씀하신 ‘인간을 창조하자!’는 명령에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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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마치 일찍이 다니엘이 통찰했던 괴생명체를 서술했던 방식과도 같으며, 다니엘의 진술을 모티프로 재형해낸 요한계시록 속 괴생물들과도 같은 것으로, 일종의 집단 영성이다. 이들 모두가 괴생명체로 묘사되는 것은 그것들이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율적 집단의 영성이라는 데 그 공통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리워야단이자 베헤못이다.

일찍이 악어나 하마나 뱀으로 혼역된 리워야단이라는 존재가 지닌 문맥들은 모두 이들 최강 파워들이 하나님 권세아래 종속되어 있다는 믿음이었다(c.f. 창 1:21; 출 7:9, 10, 12; 신 32:33; 시 91:13; 욥 3:8; 시 74:13‐17; 89:9‐10; 104:26; 사 27:1; 51:9‐10; 렘 51:34). 구약의 이러한 통찰과 기대감이 신약에 와서 성령의 이름으로 실현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파괴된 집단 영성의 치유자로서 임재된 것이다. 그 사역의 본령이 오순절 성령강림 첫 번째 현상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방언이다. 저자 누가가 바로 이 방언을 어떤 도상 속에서 위치시켰는지가 그 본령의 열쇠다.

방언은 본래 모든 신령한 은사로 들어가는 드라이브와 같은 입구다. 체험한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이같은 귀납적 체험 현장을 바벨탑 도상과 맞춰 놓은 것은 전적으로 누가의 놀라운 통찰 덕택이다.

바벨탑은 최초의 리바이어던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탑을 쌓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 들리지 않았다. 망치를 달라고 하는데 흙을 건네고, 물을 달라고 하는데 불을 건네는 언어 파괴적인 리바이어던 현상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방언의 은사 현상과 동치로 묶어 버렸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바벨탑이라는 리바이어던의 때처럼 갑자기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전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바로 그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새 리바이어던 현상 속에서는 오로지 경건한 자만 들을 수 있다.

말(logos)을 통해 재구성되는 이 작업과 공정은 각 세대가 인공적으로 창출해냈던 리바이어던을 재형 해내는 전혀 다른 개념의 리바이어던 작업 공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공 혼, 인공 관절, 인공적 이성과 의지가 아닌 성령의 사랑의 법으로 다시 창조되는 과업. 이것이 바로 성령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하시려는 일 즉, 새 리바이어던으로서 프락세이스(praxis, Acts)이다.



*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당시 교회권력에서 해방된 국가를 가리키며 또 그러한 국가의 성립을 논한다. 교회권력이 어떤 생명체로서 유기체에 훼방을 가하고 있다는 통찰로서는 같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라는 리바이어던은 역시 또다른 권력으로서 재앙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미문(美門)에서 맞는 첫 성령강림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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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옴파로스 

고대 희랍인들은 사물이나 환경에 인격을 붙여가며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가이아(대지)와 남편 우라노스(하늘), 그리고 아들 크로노스(시간), 하는 식의 신화입니다. 고대인들의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일까요? 시간 크로노스는 아버지격인 우라노스를 해하고 권좌에 오른 후 혹시 자신도 자기가 그런 것처럼 자기 자녀들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헤스티아, 데메테르, 하데스, 포세이돈..., 자녀들을 다 체내에 흡수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내 레아는 막내만큼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돌덩어리 하나를 보자기에 싸 내주고는 아이를 빼돌렸습니다. 그가 바로 제우스입니다. 제우스는 장성하여 시간(크로노스)에게 구토제를 먹여 11형제를 구해내 그 권좌에 올라 천체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희랍인들은 각 도시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델포이라는 곳에 와 점을 치곤했는데 그곳에 있는 돌 하나를 크로노스가 토할 당시 가장 먼저 튀어나왔던 돌, 즉 그 보자기 속 돌이라고 믿어서 입니다. 그 돌을 이름하여 옴파로스, 배꼽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은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에 기인합니다. A.D. 390년경 데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그곳을 찾아 점치는 일이 중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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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어느 장소로 다시 내려오시는가.

데카르트는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를 준비해서 발표를 하려다가 갈릴레이가 단죄되는 것을 보고는 이 논문 발표를 포기합니다. 당시 갈릴레이가 단죄를 당한 이유는 땅이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런 지동설을 주장한 것은 사실 갈릴레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퍼져있는 지동설은 사람들의 사고 발달에 따른 개정된 이치였지만 세상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반석인 교황이 머무는 교회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며, 만물이 이 반석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진리였습니다.  
결국 테카르트와 갈릴레이 시대가 도래 하고야 말았지만 그 중심 권좌는 여전히 인간 차지였습니다. 중세시대의 반석은 하늘이 움직인다고 가르쳐 그 권좌를 찬탈했지만 데카르트의 후예들은 그 움직이지 않는 하늘과 움직이는 땅으로 이루어진 기계로서 세상, 그 이치로서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자신들이 권좌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중심은 오로지 교회, 교회가 바로 옴파로스입니다.

교회가 그 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엡 1:22-23).

주님은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 분의 몸입니다. 세계는 그로 충만하며 모든 세계는 그 발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문학적 표현이나 수사가 아니라 세상이 운영되는 실제 이치입니다. 에덴동산이 그 땅의 중심이었듯 노아의 방주도 모든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모세의 증거막이 구속사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중심 곧, 옴파로스인 것입니다.

교회에 비밀 푸는 지혜(열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엡 1:17-19).

교회가 중심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이 비밀을 알고 있고 또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 해석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의 방법이나 이치 또는 학문으로는 축성 할 수 없는 은사입니다.

교회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7:6-19).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만물 가운데 충만하셔서 만물을 사랑하시고 운영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보호되는 곳은 오로지 교회뿐입니다. 그분 보혈은 세상 물질의 권좌나 정치 권좌나 어떤 종교적 권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신 몸 된 교회에 그 효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보혈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곳은 교회가 아닌 셈입니다.
옴파로스는 제우스의 성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태양마저 따라 움직였던 교황 권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태양과 움직이는 지구로 이루어진 기계로서 과학 원리에 맺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교회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 다시 하강하실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5월20일 부활 후 제7주
본문, 행 1: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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