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04.24 17:55

프롤로그 | 역지사지(易地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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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기돼지 삼형제>는 <일곱 마리 아기염소><빨간 모자>와 더불어 서구의 구전동화입니다. 이들을 비롯한 서구동화의 공통점 하나는 악(惡)은 언제나 늑대라는 사실입니다. 존 셰스카(Jon Scieszka)라는 사람이 이 늑대 입장을 대변하는 패러디를 책으로 냈습니다.

늑대가 할머니 생일에 쓸 케익을 만들다 설탕이 떨어져 아기 돼지들에게 빌리러 갔는데 감기가 걸려 재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그 집들이 날아가 버린 것이고, 집이 무너지면서 두 마리 돼지는 시체가 되었는데 고기는 그대로 두면 안되니깐 육식목(肉食目) 타고난 자기로서는 당연 그걸 먹을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돼지 집에 갔을 때는 할머니를 험담하는 그에게 흥분해 돼지 경찰들이 출동하는 소동이 빚어졌고 급기야 돼지들 신문에 “늑대는 포악한 동물”이라고 대서특필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식자들은 더러 존 셰스카의 이 재구성을 인용하여 “소통의 부재,” “나쁜 늑대(공공의 적)를 규정하는 집단의식”을 비판하면서 돼지들이 권력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견주어 작금의 우리 사회 단면을 보여준다는 논조의 적용을 하곤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옛날 중국의 하우와 후직이라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물에 빠진 이가 있으면 자기가 치수(治水)를 잘못해 그들을 빠지게 한 것이라 생각했고, 굶주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일을 잘못해 그들을 주리게 한 것이라 생각하여 세상이 비교적 태평한 시절인데도 자신에게 극단적 청빈을 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 성인들은 입을 모아 “이들은 각각 처지를 바꾼다 해도 모두 똑같이 하였을 것”이라고 칭찬했는데, 여기서 역지사지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결국 늑대는 역지사지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나쁜 늑대인 것입니다.

프린서플 | 義의 제사 

모든 상황(situation)에는 입장(position)이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선인(善人) 아니면 악인입니다. 누구나 반드시 선인이거나 악인입니다. 주로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에 대한 선인이며 그 누군가는 언제나 바로 나에 대한 악인입니다. 이러한 극단적 ‘입장’을 중재하고 아우르는 보편적 입장들을 묶어서 우리 사회는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법은 빈번하게 편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개정과 보완을 거듭해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드려지는 제사, 즉 예배를 그 움직일 수 없는 법으로 제정하셨습니다. 그 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움직이지 않는 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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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회개입니다(행 3:12-19).

예수님 부활․승천 후 초기의 주된 회개로의 촉구는 예수라 하는 청년을 몰라봤던 사건 그 자체에 대한 책망이었던 것으로 사료 됩니다(행 3:13-17; 9:5). 그러나 그것은 점차 “모른다”라고 하는 인간이 지닌 그 행태 자체에 대한 책망으로 확진 받게 됩니다(c.f. 롬 1:18-32). 우리는 “예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사적으로 문외 할 수는 있지만, 그 무지의 근본은 바로 “고의적으로 모르는 상태,” 즉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지닌 그 근성이 회개의 대상인 것입니다.

둘째, 책망할 것이 없음 입니다(요일 3:16-24).

고의적으로 모르는 상태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과 회개만이 바로 제사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그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제사는 오로지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교리적 강제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 분만이 그 모든 만사가 지닌 상황과 입장을 일소할 수 있는 의(義)의 키를 쥐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부터 그 열쇠를 받았을 때에 우리는 책망함이 없어질 정도의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 義의 제사입니다(시 4:1-8).

본문은 의의 제사를 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축성되거나 유지될 수 있는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그 의의 키를 갖고 계신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만이 유지될 수 있는 법입니다.


에필로그 | 의인과 죄인의 상대성 원리 

결과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에 대항 된 선인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항 된 죄인일 수 있다는 겸손함 속에서 우리를 불의로부터 구별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세우고 나아가신 의의 제사 형식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2012년 4월 22일 부활 후 제3주
본문, 시편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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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