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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13 죽어 나자빠진 후에
  2. 2012.09.08 하늘에 오를 수 없다.
  3. 2012.09.02 사제들의 존재 목적
  4. 2012.08.29 뿌리가 깊어도 부러지는 나무
  5. 2012.08.18 넝쿨이 빨아당기는 힘 2
일상 속에서2012. 9. 1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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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깜짝 놀랐다. 

지난 태풍에 뿌리채 뽑혀 죽어 자빠져 있길래 버려진 줄만 알았던 나무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자기 질료가 지닌 목적을 이어가고 있으니...

남은 걸 가지고서만도 저렇게 멋지게-

A typhoon struck our country last month. At the time I'd looked around many fallen trees. But I spotted a remnant in the fallen trees yesterday. I've found a fallen tree is alive as another form that was morphologically accomplishing its own Telos. We can find about 92 REMNANT in the Scri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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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2012. 9. 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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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잘 자라라고 물을 주었을 때, 그 식물의 대가 굵은 것에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갓 솓아나온 가는 것은 감당을 못하고 흙 지면 위로 나와있는 경계로부터 하늘을 향한 부위가 부러져 버렸다. 썩은 것이다.

흙 속의 수분량을 조절하지 못하면 그 습윤을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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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2012. 9. 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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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美門) 6번째 성찬.

사용하고 남은 빵들 처리 중... 먹어서-

사제 뱃속에 넣는 것만큼 좋은 후처리는 없다

사실,

사제의 존재 목적은

제단에서 나오는 

찌끼들의 처리용이었던 것인데... 지금은...


예배 붕괴도 

사실은,

이 찌끼라는 질료를 선물(先物), 

곧 맏물로 바꿔 먹으려드는 데서 오는 것 아니겠나-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삼상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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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2012. 8. 2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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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아무리 튼튼해도, 나뭇대 허리가 아무리 굵어도, 가지와 잎이 너무 무성하면 부러지고 마는 것을 보았다.

차라리 허리가 가늘고 길되 가지와 잎은 꼭대기 언저리에 적당한 갯수와 부피로만 있거나 - 바닷가의 소나무들처럼 - 아니면 아예 가지와 잎이 산들산들 있거나...

잎만 무성하면 가지가지를 멍청하고 어정쩡한 굵기로 만들며, 그 어정쩡한 가지들이 허리 비례에 안맞게 비대해지거나 가지수만 많아져, 바람이 셀 때 여지없이 허리를 두 동강내고 만다.

인간의 경우는 정 반대다. 신체의 뿌리는 머리이다. 왜냐하면 발이 뿌리일 리는 없으니까. 플라톤이 말하지 않았던가.

머리의 생각은 길고, 굵고, 미세할수록 그 신체를 튼튼하게 하지만, 상대적으로 손과 발이 지나치게 무성하여 쓸데없는 일들에 손을 대고, 쓸데없는 길로 다니게 되면, 이 역시 그 몸통을 두 동강내기 일쑤다.

중심축이 없는 헛된 손놀림 하도록 만드는 자들과 이 길 저 길로 끌고 다녀 허리를 결단나게 만드는 자들을 주의하라.

“약간 하위 신들이 인간의 몸을 만들 때 머리를 어떻게 만들지 선택해야 했다. 머리를 보다 견고하게 만들어 사유 능력은 떨어지더라도 수명을 길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아주 약하게 살짝 덮어씌우기만 하여 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생활을 영위하도록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가운데 후자를 택했다. 간장(肝臟)이 비록 낮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어떤 고상한 생각을 반영하고, 십이지장도 그 길이가 길어 식사 시간을 오래 소요함으로써 결국 충분히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다. 역시 이런 면에서 신체의 최고 정점은 그 직립이다. 천공의 모형인 둥근 머리를 위로 치켜든 인간은 식물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천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플라톤)

오늘 학교 강의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번 태풍(볼라벤)에게 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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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2012. 8. 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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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오르던 산 속 나무숲이 마치 정글처럼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무마다 넝쿨들이 휘감아 있다. 저렇게 높은 길이를 지난 몇 달 새 다 휘감아 올라갔다. 기둥이 되어 준 나무라는 식물도 그렇지만, 한해살이에 불과한 저 식물들의 흡입력이 더 놀랍다. 여러 해가 아닌 단 몇 달 새에 자신의 키를 다 흡입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식물이지만 이들에게 프쉬케가 없는 게 아니다. 프쉬케의 가장 기본 능력인 섭생능력을 토대로 살아간다. 생명흡입, 섭생능력 곧, 영양섭취의 힘은 아래로부터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인가 위에서 빨아당기는 힘인가? 그러면 이들의 영혼은 뿌리인가 아니면 그 줄기와 잎의 끝인가? 또한, 그런 점에서 이들의 영혼은 부분인가 전체인가?

죽은 것에는 흡입력이 없다. 공기도 물도 들이마시지 못한다. 죽은 나무와 풀에 흡수되는 물은 스며드는 것이지 섭취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스며들어도 그것은 썩을 것이다. 이것으로 생명을 판단한다.

우리 신체의 영혼의 힘은 끌어당기는 힘인가, 밀어 올리는 힘인가? 넝쿨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분인가 전체인가? 심장과 압력이라고 말하겠지. 압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호흡, 곧 영양섭취로서 프쉬케의 힘이 근원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컨대 기독교 정체성 속에 행해지는 금식은 신에게 부려보는 투쟁도 아니고 극기와 맞바꿔 얻어내는 마술의 힘도 아니며, 그것은 바로 가장 기본이 되는 그 섭생의 프쉬케를 불러 깨우는 노력인 것이며, 그 프쉬케가 대기 중에 흩어진 프뉴마(바람)와의 운동일 때 의미가 있다. 이 유일한 운동력이 아니면 어떻게 (1) 풀고, (2) 끌러주고, (3) 자유케 하고, (4) 꺾는 모션을 불러일으키겠는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따라서 우리가 굶을 때 - 그것은 의도적인 단식일 수도, 가난함의 주림일 수도 있지만 - 우리는 죽음과 거의 동시에 생명의 힘을 체험한다. 혀의 감각에서 비롯되는 시장기와는 다른 영혼으로부터 밀어 올리고, 끌어당기는 허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통찰은 지당한 것이다. 이 섭생이 영성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관문과도 같은 영혼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친근한 허기는 영양의 굶주림이라기보다는 감각 혼, 즉 탐욕의 허기에 더 가깝다는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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