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속에서'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2.07.11 사유하는 에너지 원소, 결핍 2
  2. 2012.07.06 의식 주입의 기술
  3. 2012.07.02 Ego Vs. Eco
  4. 2012.06.07 전심(全心)이란 무엇인가?
  5. 2012.06.01 공학적 신앙
공상 속에서2012. 7. 1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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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결여됨> 혹은 <결핍>을 통해 “의도”라고 하는 지향성이 생겨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사유”라고 부른다. 이것이 실로 그러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이 공백과도 같은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니이체는 “결핍” 그 자체를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가능성”이라고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그 결핍 대신에 “욕구”라는 표현을 썼고 아울러 충동이라는 내부 구조를 통해서 출현하게 된 외부 세계를 밝혀냈다.

마틴 하이데거는 그 결핍의 인식을 “처해 있음”이라는 불안 증세로 설명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처해 있음”이라는 강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통해 <기투>라는 이 세상의 설계 구조를 밝혀냈다. 태어나자마자 우는 갓난아기의 울음의 원인을 이 “처해있음” 말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며, 마찬가지로 “내던져진 것”과도 같은 우리 자신의 이 내면의 느낌을 <기투> 말고 무엇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파스칼이 이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우리 인간들에게는 채울 수 없는 공백(공간)이 있다고 일찍부터 일러두었다.

우리가 <결핍>과 <욕구>로 둘러싸여진 <처해있는> 존재라는 것은 지당한 발견이다. 언제나 그런 원리였던 것처럼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이 결핍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 짊어진 결핍을 통해 밝혀졌다.

니이체는 “나는 무척 독립을 갈망한다”고 간절히 소망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에 내 모든 걸 희생시켜도 좋다. 아마도 내가 가장 의존적인 영혼을 지녔기에,... 다른 사람이 쇠사슬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죽기 10년 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이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된 채로 살아갔다.

파스칼 역시 고통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애 말기에 지독한 치통에 이어 끊임없는 두통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천연두에 걸린 가난한 가족에게 자기 집을 내주고 시집간 누이 집에 얹혀살았다. 그는 39세에 죽는다.

결핍을 밝혀낸 결핍어린 삶들을 향해, 우리는 어떤 사람은 사악하게 묘사하고 어떤 사람은 성자처럼 묘사하지만 모두가 “처해짐”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간다.

다만 우리가 파스칼을 기억하는 것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아서이거나 행복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그 결핍 즉, 공백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빈 공간이 존재한다” -블레이즈 파스칼-


“There is a God shaped vacuum in the heart of every man which cannot be filled by any created thing, but only by God, the Creator, made known through Jesus.” -Blaise Pascal, Pens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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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7. 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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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줄 알고 살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움직이지 않는 태양의 정체를 알아버린 사람들이 그 태양의 크기도 재고 거리도 재기 시작했다. 이 거리감의 기술은 태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구 밖 가까운 곳까지 날아갈 뿐만 아니라 돌아오기까지 할 정도의 치밀한 기술로 발전했다. 이러한 측량술에 배인 <의심의 기술>은 사회·문화·정치·경제 인간의 모든 생태 반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태양은 그렇게 이미 존재하는 것인데도, 그 의심의 기술은 또 다른 의심의 기술의 고안을 불러왔다. 그 측량술을 파괴하려는 반동들이 거듭 생겨난 것이다. 그들 중 하나는 이 태양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인식한다.

우리가 [태양]이라는 한글을 읽을 때 그것은 ‘태양’이다. 그러나 그것이 ‘태양’이 되기까지는 두 단계 과정을 거친다. 우리가 흰 바탕에 검은 선으로 된 두 개 덩어리를 인식해야 하고 그리고는 ‘태’와 ‘양’이라는 음을 그 두덩어리에 붙여 의미의 결합을 이루는 <작용>의 과정이다.

그러면 [태양]은 언제 존재하는가? (1) [태양]이라고 기록되었을 때인가 (2) 두 개의 문자 덩어리를 목격했을 때인가 아니면 (3)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그 <작용>을 일으키는 순간인가.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아무리 [태양]을 들이대 봐야 이해하지 못한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제아무리 [예수]라는 글자를 몸에 좋다고 내복에 꿰매고 다녀도 그 어떠한 존재로도 발생하지 않는 이치다.

노에시스라고 부르는 이 (3)항의 작용을 후설과 같은 사람들이 발전시켰는데 그들에게는 모든 사물이 노에시스 할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노에시스는 누스(정신)에 노에인(지각하다)이라는 단어를 붙여 만든 합성어다.

[태양]이라는 글자와 [예수]라는 글자를 내복에 부적처럼 꿰매고 다니는 것도 무속적이지만, 본회퍼와 같은 행동파 항렬의 사람들이 볼 때 이런 노에시스와 같은 탐구는 모두 관념적 귀신의 말장난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인간의 대화는 “자기”와 “타자” 라는 의식 사이에 발생한다. 특히 “자기”는 “타자”의 여러 가지 행동과 반응을 - 눈 모양, 입 모양, 얼굴 표정 등을 - 살펴가면서 언어구사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은 이 탐색의 과정 속에서 “자기”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을 “자기의 의식”을 그 타자의 머리 위에 한 움큼씩 뿌려가며 언어구사를 하는 측정술에 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의 노에시스 체계를 이용하여 때로는 과장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낮추는 척도 하고, 때로는 상대를 깎아 내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회적 위협도 가해가면서 자신의 의식을 주입하여 마침내는 자신의 세계를 관철시키고 건설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인간만이 구사하는 언어세계 기술이다. 특히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 말씀으로 지어 놓은 세상을 자신들의 노에시스 언어 체계로 재창설 해 놓았다.

이것이 아담이 훔쳐낸 로고스 체계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전개가 그의 이름 짓는 기술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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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7. 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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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 대한 오용이 있어 몇 자 적는다.

환경을 파괴한 인류, 특히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들 마저 그 파괴에 앞장선 데 대해 격분한 사람들이 우리 인류가 지닌 Ego(나) 중심 사고를 겨냥해 Eco(생태) 중심 사고로써 고발하는 용도로 이 기발한 그림을 인용한다.

그 외에도 진정한 생태를 걱정하는 고발이 아닌 이 땅 모든 정복자들을 향한 괜한 격분의 안티로서 가세하는 인용도 있는 것같다. 내가 보기엔 그 고발자도 새로운 개념의 정복자로만 보인다.

영어 “I”로 번역되는 이 라틴어 Ego라는 말은 본래 “나”를 뜻하는 희랍어 εγώ에서 온 말이다. 반면 영어 eco- 접두사가 될 Eco는 “집”을 의미하는 희랍어 οίκος에서 왔다.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이 <집>에서 비롯된 셈이다.

사회적 지탄뿐 아니라 Lynn White와 같은 학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성경관은 이미 고발된 상태다. 그러나 그를 포함하여 Ego를 그릇 이해하는 자들이 저런 그림을 만들어냈다. 지구의 환경과 생태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는 신으로부터 지구의 다른 종들과는 달리 <이름>을 하사 받았고, 그 다른 종들은 인류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았다. 인간의 <이름>을 신이 직접 하사하셨던 것과는 달리 다른 종들의 <이름>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다. 이것은 신의 용인과 묵인 아래 그렇게 된 것이다(창 2:29). 여기까지가 Eco의 본원적 형식이다.

그러나 인류는 다른 종의 <이름> 만이 아니라 자기 신들의 <이름>을 짓는 오류를 범하였다. 유대인들은 자기 신의 이름을 짓지 않고 간신히 물어보는 것으로 끝마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제 3계의 침범으로서는 같은 형식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의 형식이 <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은 <법>으로 살상한다. <이름>(nomen)이 <법>(nomous)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그러나 신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묘한 이름으로써 밝히셨다. 그것이 바로 <Ego>다. 이 <이름>이 예수라는 한 인물의 자아(ego)를 통해 우리 심장에 들러붙고 말았다. 인류를 지은 자의 이름도 Ego요 인류의 이름도 Ego요 그것을 순환케 한 이의 이름과 삶도 Ego라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창 1:28의 “정복”이 정복이 아닌 “지킴”으로서의 카바쉬임 다시 주석한다.

집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가 집을 지킬 것인가. 어머니가 지키려니와 어머니마저 없으면 누가 지킬 것인가. 형이 지킬 것이거니와 형마저 없다면 <나> 즉, Ego가 동생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家長) 없는 집은 없거니와 <나>가 없으면 <집>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Ego 좌측 그림은 Eco 우측 그림에 선행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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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6. 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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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는가-”라고 했을 때,
<전심>은 새벽부터 저녁에 이르는 마음의 수많은 부분들이나
직장으로부터 교회에까지 이르는 수많은 마음의 부분들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딱 두 개의 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두 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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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6. 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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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단지 화학이나 물리 같은 학문으로만 한정지어진 사이언스(Science)라는 단어는 본래 총체적 ‘지식’을 의미하는 라틴어 “싸이엔티아”에서 온 말이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자연과학의 충격과 위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문화나 사고까지도 화학과 물리의 방식으로 달아 잰다는데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역사를 달아 재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가령 노아 방주의 넓이, 길이, 높이를 재서 기린의 목과 비교 해보곤 안심하는 식의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의 산물이다.

이런 똑똑한 사고방식에 반기를 든 입장이 나타났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는 그 자체로 밖에는 이해가 안된다는, 그 이해의 방식에 관한 제동이었다. 뭔가를 이해한다고 했을 때 - 그것이 역사이든 과학이든 - 이미 ‘이해’를 바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직접 경험한 것 없이 어떻게 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공리(公理)의 성공이었다.

쉽게 말하면 노아의 방주를 재보고 안심하는 식의 공리로써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봐준다 치더라도, 그를 장로교인이나 감리교인 혹은 성결교인, 심지어 순복음교인으로 간주하는 상상은 전적으로 자기 이해로서 공리이지 소위 과학이 추구하는 그 공리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딜타이에게서 <생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래, 이를 토대로 한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 출현의 전거가 되는데, 한마디로 그것은 역사를 달아 재는 방식을 둘러싼 투쟁 학문이라 감히 규정지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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