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속에서2012. 5. 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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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사용자 중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그룹'에 묶인 다든지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이벤트 초대장'이 날라 든다든지 해서 짜증 내는 분들이 있는 것같다.

그런가 하면 기본 정보만 보고 친구 요청-수락을 했는데 그의 포스팅 성향이나 성질 또는 사상이 영 아니다 싶어 괜히 맺었어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관계를 자르면 상대는 불쾌해하고… 하지만 그럴 것 없다.

Facebook사용자로 자신을 수락한 이상 그러려니 하면 된다. 이것은 Facebook이 구현되는 기본 인터페이스 자체가 문화화 되는 과정의 한 양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2000년도 전후인가부터 선보였던 푸쉬기술이란 게 있었는데, 그 기법이 아마도 이제는 아예 문화로 양생되는 과정인 것으로 엿 보인다. 

가령 싸이월드 인터페이스를 떠올리면 벌써부터 문화차이를 느낄 것이다. 그곳은 일일이 찾아 다녀야 한다. 친구가 많아지면 할 짓이 못된다. 반면 페이스북은 어떤가. 편리하다. (싸이월드가 식은 밥 같이 느껴진다면 그는 이미 양생이 어느 정도 된 셈이다.)

내 체감 기준으로 1천 명 정도까지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소화가 가능할 것이다. 왜? 밀어주니까. 하지만 5천명? 그건 사실상 영업이다. 그 정도 량의 뉴스/리센트리 푸슁은 사실상 공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밀고 들어와도 그러려니 하고, 짤리면 짤렸나부다 하고… 쥬커버그 나라의 문화인기라- ;-) 

//솔직히 말해 보시오. 몇 명으로부터 짤렸고 당신은 몇 명을 짤랐소! 그리고 꼴비기 싫은 사람도 있즤?! 머? 나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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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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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슈퍼맨

어려서부터 공상과학 소설에 빠져 살던 두 친구가 만화를 만들었습니다. 글을 주로 쓴 친구는 주인공에게 자기처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입혔습니다. 좋아하는 여성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자기를 닮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초능력자입니다. 가슴에는 역삼각형의 S자를 새겨줬고, 악당들과 싸울 땐 더 멋져 보이라고 망토도 달아줬습니다. 그림을 맡은 친구가 모든 걸 멋지게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을 알아주는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번번이 퇴짜를 맞자 상심한 나머지 그림을 몽땅 찢어 불태우고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 하다가 Detective Comics라는 한 출판사 잡지를 통해 간신히 빛을 봅니다. 그 해가 1938년입니다. 처음에 이 회사 사장은 이 만화를 신통치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출판사가 이 만화를 표절하자 가치를 인지하면서 지면 할애를 늘렸고 평균 25만 달러였던 매출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그렇지만 원저자인 두 사람은 회당 500달러밖엔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주인공 캐릭터 저작권까지 같이 넘긴 바람에 훗날 이 캐릭터 가치가 엄청나게 상승했음에도 둘에게는 별 소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회사와 소송을 거듭하다 전 재산까지 날리게 됩니다. 후일 만화계의 설득으로 회사로부터 소정의 연금도 받고 책에 이름이 나올 정도로 명예도 회복되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캐릭터만큼 부를 거두진 못하고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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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렸던 친구 조 슈스터는 1992년 78번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고, 글을 썼던 친구 제리 시겔은 4년 후 LA에서 82세 나이로 그 뒤를 따릅니다. 이 만화책 주인공이 바로 슈퍼맨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슈퍼맨은 이들 자아가 담긴 원작 위 에 여러 사람의 갈망이 덧입혀진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린서플 | 버린 돌

누군가를 고대하는 대망(待望) 사상은 모든 민족이 지닌 보편적 사조입니다. 인도의 하누만 이야기를 리메이크 했던 중국의 서유기 주인공이 돌에서 태어난 것처럼 우리나라 동(東)부여의 왕 금와(金蛙)도 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판 손오공인 슈퍼맨마저 운석, 즉 돌을 기원으로 합니다. 서로 물리적 교류가 가능한 범위 내의 지역 문화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저히 교류가 불가능한 지역 간 문화 속에서도 이러한 사조가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그 대망에 응할 누군가가 실제로 정말 존재한다는 객관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돌이 “버려진 돌”이라는 역설로서 그 돌의 진위를 가려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입니다(행 4:11; 벧 2:7b; 시 118:22).

세상이 대망하는 돌은 최후에 가서는 사람들의 환호와 영광을 한 몸에 받는 돌이지만 이 돌은 최후의 순간까지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서 그 이야기가 완전히 종결됩니다. 그렇게 끝난 것을 하나님께서 땅 속으로부터 다시 꺼내 머릿돌로 쓰십니다. 

약속의 돌입니다(c.f. 창 28:18; 31:45).

다윗은 여느 왕들처럼 왕의 혈통에서 낳고 자라다가 등극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가 혁명을 통해 보좌에 올랐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울 왕과 사람들로부터 거부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다가 이스라엘을 통일해낸 인물입니다. 그의 고통이 시편 면면에 묻어나고 있으며 특히 118편 본문 속 <버린 돌>도 이때를 상징하는 시어(詩語)입니다. 이스라엘의 돌이 야곱의 베개였다면(창 28:11, 18) 그의 돌은 버려진 돌인 것입니다. 이 돌의 약속대로 대망의 예수께서 오셔서는 똑같이 <버린 돌>로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그를 거부 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그 돌이 머릿돌 된 집에 의(義)의 문이 달렸습니다(시 118:19-24).

다윗 자신이 그러한 삶을 통해 실제로 아들 솔로몬 성전의 머릿돌 역할을 한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대망하는 모든 민족의 머릿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로지 그가 머릿돌로 계신 하나님의 집에만 의의 문이 나 있으며, 반대로 의의 문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집이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머릿돌

다윗은 혈통도 혁명도 아닌 방법으로 왕에 등극한 특별한 인물이지만 통치 과정에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서 그의 종말, 그리고 빛바래 스러져 가는 후손들로 얼룩진 그의 가계를 볼 때 그는 버려진 돌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돌에 임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다시 숨을 쉬면서 모든 민족을 품는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2012년 4월 29일 부활 후 제4주
본문, 행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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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2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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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역지사지(易地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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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기돼지 삼형제>는 <일곱 마리 아기염소><빨간 모자>와 더불어 서구의 구전동화입니다. 이들을 비롯한 서구동화의 공통점 하나는 악(惡)은 언제나 늑대라는 사실입니다. 존 셰스카(Jon Scieszka)라는 사람이 이 늑대 입장을 대변하는 패러디를 책으로 냈습니다.

늑대가 할머니 생일에 쓸 케익을 만들다 설탕이 떨어져 아기 돼지들에게 빌리러 갔는데 감기가 걸려 재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그 집들이 날아가 버린 것이고, 집이 무너지면서 두 마리 돼지는 시체가 되었는데 고기는 그대로 두면 안되니깐 육식목(肉食目) 타고난 자기로서는 당연 그걸 먹을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돼지 집에 갔을 때는 할머니를 험담하는 그에게 흥분해 돼지 경찰들이 출동하는 소동이 빚어졌고 급기야 돼지들 신문에 “늑대는 포악한 동물”이라고 대서특필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식자들은 더러 존 셰스카의 이 재구성을 인용하여 “소통의 부재,” “나쁜 늑대(공공의 적)를 규정하는 집단의식”을 비판하면서 돼지들이 권력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견주어 작금의 우리 사회 단면을 보여준다는 논조의 적용을 하곤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옛날 중국의 하우와 후직이라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물에 빠진 이가 있으면 자기가 치수(治水)를 잘못해 그들을 빠지게 한 것이라 생각했고, 굶주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일을 잘못해 그들을 주리게 한 것이라 생각하여 세상이 비교적 태평한 시절인데도 자신에게 극단적 청빈을 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 성인들은 입을 모아 “이들은 각각 처지를 바꾼다 해도 모두 똑같이 하였을 것”이라고 칭찬했는데, 여기서 역지사지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결국 늑대는 역지사지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나쁜 늑대인 것입니다.

프린서플 | 義의 제사 

모든 상황(situation)에는 입장(position)이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선인(善人) 아니면 악인입니다. 누구나 반드시 선인이거나 악인입니다. 주로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에 대한 선인이며 그 누군가는 언제나 바로 나에 대한 악인입니다. 이러한 극단적 ‘입장’을 중재하고 아우르는 보편적 입장들을 묶어서 우리 사회는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법은 빈번하게 편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개정과 보완을 거듭해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드려지는 제사, 즉 예배를 그 움직일 수 없는 법으로 제정하셨습니다. 그 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움직이지 않는 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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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회개입니다(행 3:12-19).

예수님 부활․승천 후 초기의 주된 회개로의 촉구는 예수라 하는 청년을 몰라봤던 사건 그 자체에 대한 책망이었던 것으로 사료 됩니다(행 3:13-17; 9:5). 그러나 그것은 점차 “모른다”라고 하는 인간이 지닌 그 행태 자체에 대한 책망으로 확진 받게 됩니다(c.f. 롬 1:18-32). 우리는 “예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사적으로 문외 할 수는 있지만, 그 무지의 근본은 바로 “고의적으로 모르는 상태,” 즉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지닌 그 근성이 회개의 대상인 것입니다.

둘째, 책망할 것이 없음 입니다(요일 3:16-24).

고의적으로 모르는 상태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과 회개만이 바로 제사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그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제사는 오로지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교리적 강제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 분만이 그 모든 만사가 지닌 상황과 입장을 일소할 수 있는 의(義)의 키를 쥐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부터 그 열쇠를 받았을 때에 우리는 책망함이 없어질 정도의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 義의 제사입니다(시 4:1-8).

본문은 의의 제사를 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축성되거나 유지될 수 있는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그 의의 키를 갖고 계신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만이 유지될 수 있는 법입니다.


에필로그 | 의인과 죄인의 상대성 원리 

결과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에 대항 된 선인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항 된 죄인일 수 있다는 겸손함 속에서 우리를 불의로부터 구별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세우고 나아가신 의의 제사 형식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2012년 4월 22일 부활 후 제3주
본문, 시편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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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4. 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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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키보드 보면대와 기타 밸트를 헌신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배 전에 한 두 곡 여는 찬양할 때 기타를 쓰는데
밸트가 없어가지고 그동안 흰색 노끈으로 묶어서 썼더니...
제가 빨리 샀어야 했는데 미안쿠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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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4. 20.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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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도 희미한 교회가 저 창 밖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 어불성설 아닌가.
창에다가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새벽이 피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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