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8.15 나는 어디 쯤 와있는가? [리바이벌 I]
  2. 2012.07.02 Ego Vs. Eco
공상 속에서2012. 8. 1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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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려운 일을 하나 하고 있다. 10년도 넘은 글들을 통해서 나를 심판하는 작업이다. 흔히 밤새 쓴 편지나 일기를 다음 날 아침 찢어버리고픈 정신 역학을 감안한다면, 이 10년도 넘은 텍스트는 나의 심판주다.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각각이 커다란 시간표 안에 존재한다. 종교적으로 생각하든 종교를 떠나서 생각하든 어쨌든 인간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혹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진행'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찢어지고 헤졌다가 봉합된 시간 위에 서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누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시간에 머무르기도 하는데, 우리가 그 모든 시작은 목격 하지만 도무지 끝은 알 수 없다. 끝이 어떤 지도 알 수 없지만 끝이 어느 지점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나는 어디 쯤 와 있는가. 한번 쯤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냥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어디 쯤 와 있는가. 당신이 만약 스스로를 느끼고 또 어디쯤 와 있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면 당신의 인생이 지금 그렇게 그 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나는 어디 쯤 와 있는가.> 라고 하더니 갑자기 <당신이 만약 스스로를.... 당신의 인생이 지금 그렇게 그 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나는 어떻게 감히 알 수 없는 상대를 향해 <그 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복음을 그런 식으로 던지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를 목적하고 있을까? 그럴 자격이 과연 있었을까? 이것이 사제 된 동력이었을까?

저 자아가 말하고 있는 그 시간표라는 틀에 날 넣을 때 정작 난 어떤 결말에 와 있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1년 4월 26일자 텍스트 앞에서
나의 자아를 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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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
공상 속에서2012. 7. 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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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 대한 오용이 있어 몇 자 적는다.

환경을 파괴한 인류, 특히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들 마저 그 파괴에 앞장선 데 대해 격분한 사람들이 우리 인류가 지닌 Ego(나) 중심 사고를 겨냥해 Eco(생태) 중심 사고로써 고발하는 용도로 이 기발한 그림을 인용한다.

그 외에도 진정한 생태를 걱정하는 고발이 아닌 이 땅 모든 정복자들을 향한 괜한 격분의 안티로서 가세하는 인용도 있는 것같다. 내가 보기엔 그 고발자도 새로운 개념의 정복자로만 보인다.

영어 “I”로 번역되는 이 라틴어 Ego라는 말은 본래 “나”를 뜻하는 희랍어 εγώ에서 온 말이다. 반면 영어 eco- 접두사가 될 Eco는 “집”을 의미하는 희랍어 οίκος에서 왔다.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이 <집>에서 비롯된 셈이다.

사회적 지탄뿐 아니라 Lynn White와 같은 학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성경관은 이미 고발된 상태다. 그러나 그를 포함하여 Ego를 그릇 이해하는 자들이 저런 그림을 만들어냈다. 지구의 환경과 생태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는 신으로부터 지구의 다른 종들과는 달리 <이름>을 하사 받았고, 그 다른 종들은 인류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았다. 인간의 <이름>을 신이 직접 하사하셨던 것과는 달리 다른 종들의 <이름>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다. 이것은 신의 용인과 묵인 아래 그렇게 된 것이다(창 2:29). 여기까지가 Eco의 본원적 형식이다.

그러나 인류는 다른 종의 <이름> 만이 아니라 자기 신들의 <이름>을 짓는 오류를 범하였다. 유대인들은 자기 신의 이름을 짓지 않고 간신히 물어보는 것으로 끝마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제 3계의 침범으로서는 같은 형식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의 형식이 <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은 <법>으로 살상한다. <이름>(nomen)이 <법>(nomous)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그러나 신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묘한 이름으로써 밝히셨다. 그것이 바로 <Ego>다. 이 <이름>이 예수라는 한 인물의 자아(ego)를 통해 우리 심장에 들러붙고 말았다. 인류를 지은 자의 이름도 Ego요 인류의 이름도 Ego요 그것을 순환케 한 이의 이름과 삶도 Ego라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창 1:28의 “정복”이 정복이 아닌 “지킴”으로서의 카바쉬임 다시 주석한다.

집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가 집을 지킬 것인가. 어머니가 지키려니와 어머니마저 없으면 누가 지킬 것인가. 형이 지킬 것이거니와 형마저 없다면 <나> 즉, Ego가 동생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家長) 없는 집은 없거니와 <나>가 없으면 <집>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Ego 좌측 그림은 Eco 우측 그림에 선행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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