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11.05 익명성(Anonymous)의 기원
  2. 2013.04.28 유토피아가 임하는 방식
말씀 속에서2013. 11. 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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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익명(Anonymous)에 대한 문자적 유래 입니다. 

Anonymous(어나니머스)는 onym이라는 말에 a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된 말이다. onym은 name의 어근이다. onyma은 onoma와 더불어 희랍어로서 onym에서 'o'가 탈락되고 음가를 통해 name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ous는 ‘있는’(full)이라는 접미이고 a(n)는 부정(not)이다. 이렇게 해서 이름(onym/name)이 없다(an/not)는 뜻 즉, ‘이름을 숨긴’을 뜻하는 ‘익명의’라는 어휘가 태어나 ‘가명의’라는 뜻은 물론 ‘무명의’(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특징이 없는’(이름을 붙일 수 가 없는)이라는 뜻으로까지 사용되었다. ous가 빠진  anonym은 ‘가명, 변명, 익명, 작자 불명의 저작’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리고 anonymous에서 an을 제거하면 ‘이름이(onym=name) 있는(ous=full)’으로 쓰면 ‘이름을 밝힌’이 된다. 또 접두를 바꿔서 몇가지 단어가 나온다. acronym은 ‘이름(onym)의 첫 글자(acro=head)’라는 뜻에서 ‘두문자어’가 되었다(AIDS같은-). allonym은 ‘다른(all=allo=other) 이름(onym=name)’이라는 뜻에서 ‘필명’(남의 이름으로 출판된 작품) 등의 말이 되었다. antonym은 ‘반대되는(anti=against) 이름(onym=name)’이라는 ‘반대말’로, synonym은 ‘같은(syn=same) 이름(onym=name)’이라는 ‘비슷한 말’로, homonym은 homo(same)가 붙어서 ‘동철이의어’이 되었다(can[깡통]과 can[할 수 있다]의 예). patronymic은 ‘patro(father)’와 결합되어 ‘아버지의 이름을 딴’이라는 뜻으로, pseudonym은 pseud(거짓의, 가짜의)와 결합되어 ‘익명, 아호’의 뜻으로 활용되었다. 이상 anonymous의 용법이다.


다음은 그 익명에 대한 몇 가지 예시입니다.

(1) 조직이나 집단 속에서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 속해서 나의 뜻을 관철 시킬 때, “누가누가 이렇게 말하더라”(“-카더라”: ○○가 ~라고 하더라)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 의견을 발의하고, 제시하고, 대변하고, 반론하고, 관철시킵니다.


(2) 가난한 자와 약자 앞에서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붓자, 제자 중 하나(가룟 유다)가 책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가난한 자는 가룟 유다가 사용하는 익명입니다. 즉 삼백 데나리온은 가난한 자가 아닌 자기가 갖고 싶은 재물인 것입니다. 


(3) 형제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요셉을 해한 형제들은 요셉의 옷을 아버지에게 가져나가 보이면서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라고 말합니다. 가인은 자신을 “아우를 지키는 자”라는 익명 속에 자신을 감추고, 동생을 해한 형제들은 자신들이 해한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익명 속에 감춥니다.


(4) 원시인들의 경우


다음은 민속학적 고찰인데, 미개인이나 원시인들은 자기 종족의 왕을 뽑을 때 경건하게 뽑습니다. 어찌나 경건하게 생각하는지 왕이 쓰던 물건에 자기 신체가 접촉하기라도 하면 큰 일이 날 것처럼 여길 정도입니다. 어느 날 왕의 쓰던 물건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걸 안 순간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실제로 죽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같은 신적 권위가 있는 왕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종족의 안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하늘에서 비가 오게 하는 것까지 포합됩니다. 가뭄이 들면 그 왕은 어떻게 해서든 대개 비가 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아무리 해도 비가 안오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왕을 세운 종족은 가차없이 그 왕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왕을 세웠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왕을 세워 나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있어 왕은 욕구와 그 앙갚음의 익명의 대상인 것입니다. 


위에 열거된 예시들은 모두 익명(anonymous)에 관계된 인간이 갖는 행태입니다. 


(5) 십자가에서


그 익명성을 모두 제거하고 일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드러냈고, 또한 자신의 실체를 밝혔으며,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익명이 아닙니다. 그의 실명 나사렛 예수께서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달리실 당시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열거된 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익명성인 것입니다. 즉 익명이 아닌 실명으로 하였지만 그것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철저한 희생일 때 형성되는 익명성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의 본질이며, 그래서 이름(onym)은 그와 같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2013.7.28일자 설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 눅 10:1-4; 골 2:6-15 (c.f. 호 1:2-10; 시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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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4. 2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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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것을 제거하고 물질만을 토대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 공산주의(communism)라면, 자본주의(capitalism) 중에 더러는 영을 물질로 바꿔치기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둘다 물질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같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 영혼이 잘되는 것이지, 영혼이 잘 됨같이 어떻게 범사에 부자가 된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유토피아는 물질로 물질을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이 양자와 전혀 다르다. 
이를테면, “분노”, “폭력”, “배신”,..., “죽음”, 

물질이 산출해낸 그 모든 플롯(plot)을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당하고 통과해 뚫고 지나간 것, 이것이 바로 물질로 물질을 깨뜨리는 방식, 즉 그의 영광이 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그의 유토피아가 임했다.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서 뛰쳐 나간 직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요 13:31)고 말한 그 알 수 없는 의미도 이로써 이해될 수 있다.   


프롤로그 | 공산주의의 태동.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막스는 1818년 프로이센 왕국에서(지금의 독일)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유대계였지만 복음주의 국교회로 개종한다. 칼 역시 6세 때에 세례를 받았며 청년기까지만 해도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봉사와 희생의 의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35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그리스어, 로마 신화, 미술사 같은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는데 암흑기를 사는 대학가가 대개 그렇듯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운동권 학생이었던 것같다. 행동주의자들이 포함된 시인 클럽에도 출입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검거되거나 추방 당할 때 그는 1년 후 법률과 철학을 공부하러 베를린으로 떠난다. 이때 마르크스는 당시 베를린대(大)를 휩쓸던 헤겔철학과 만난다. 처음엔 괴리감을 느꼈으나 베를린 혁명문화에서 헤겔의 비중은 압도적인 것이었기에 그는 관련 학회 클럽에도 가입한다. 

이 클럽의 핵심인물이 바로 젊은 신학강사 브루노 바우어였다. 바우어는 근대 신학 예수 연구에 있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학풍을 연 학자로 소개되는 인물이다. 그는 복음서가 어떤 실제적인 역사의 기록물이라기 보다는 감성적 필요와 기대감에 따른 기록이며, 예수 또한 역사적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도발적 가설을 전개시켰다. 칼 막스는 예언자 이사야에 대한 바우어 강좌를 수강했다. 여기서 바우어는 새로운 사회적 파국, 즉 예수의 재림시에 닥칠 시련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이 청년 헤겔 학파가 급속도로 무신론화 되면서 칼 막스는 정치적 행동들을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프린서플 | 유토피아가 임하는 방식.

칼 막스를 경도시켰던 헤겔의 역사 인식이란, 역사 자체를 절대자로 놓고 그것은 모순과 부딪쳐가며 ‘발전’해나가는 양식일 뿐이지, 어떤 목적을 가진 신이 곧 역사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의 토대가 될 변증법적 유물론을 착안한 칼 막스는 모든 정신적인 것을 속임수로 간주해 부정하고 오직 물질을 토대로 된 세상을 다시 건설하려 했습니다. 영적인 모든 것을 일종의 환각으로 여기면서까지 그가 추구하고 건설하려던 세상은 한 마디로 철저하게 지상낙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나라는 지상낙원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이었으며 그가 어떻게 물질세계를 뚫고 나가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사람이 예배드리러 도착했을 때.

요한복음에는 ‘예배’라는 말이 11회 나옵니다. 예배의 장소를 지목할 때 두 번(요 4:20[2]), 예배의 시간을 지목할 때에 두 번(4:21, 23), 알거나 모르고 드리는 예배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즉 예배의 질에 대한 표현으로서 세 번(4:22[2], 24),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두 번(4:23, 24)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고침 받고 믿음을 받아들이는 경의의 표현에서 한 번(9:38), 그리고 끝으로 나머지 하나는(12:20) 유월절에 예배드리러 온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왔다는 것인지 예수께 왔다는 것인지 모호하게 된 문장 속에서 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후 예수께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v. 23)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감안할 때 이들의 도착해 예배하려던 대상은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도착했을 때, 바로 그 때 예수께서 영광 얻는 때가 도래합니다.


사람이 떠났을 때.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가 (배신을 하러) 떠간 후에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앞으로 있을 십자가 형을 염두에 둔 표현인 줄 알고 개의치 않고 읽지만 “지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배신을 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나가버려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떠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 계실 때.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당도했다가 다시 모두 다 떠나게 되면, 남는 것은 자신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인자가 들리는 것을 말하며 들리는 것은 십자가 형을 말하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홀로 감당하심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 유물론의 천적.

칼 막스는 철저하게 정신적인 것을 제거하고 물질로만 된 유토피아를 건설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물질에 반한 것이라며 영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은 영적인 것이되 철저하게 물질로 가격한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지상낙원의 폭력은 이같이 물질을 물질로 부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 거짓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물론의 천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미지 참조: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3/jan/25/karl-marx-relevant-21st-century
http://en.wikipedia.org/wiki/Judas_Iscar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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