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12.09 이사야서 11장,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는 누구인가?
  2. 2012.12.23 변절인가 변화인가
카테고리 없음2013. 12. 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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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을 당시 세상에 곧 종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 꿈이 헛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 후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꿈에서 인식되곤 했지만 전과는 달리 그것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읽다보면’ 당초 전제된 심상과는 전혀 다른 뜻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주로 계시로 인준하는 편이다. 


(1)


과거 종말론이 전국을 강타했을 당시 대부분의 집회에서는 이 노래가 빠지지를 않았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 ... 사막이 낙원되리라 //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즈음 어느 날인가 꿈에 보이기를, 정각 6시를 가리키는 한 대형 괘종시계가 보이더니 “이제 곧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생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시한부 종말론 서적에서 나오는 식으로 나도 뭔가 신령한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며 사람을 대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2)


미문(美門)을 시작한 이후 꾼 의미 있는 꿈은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① 날이 서지 않은 스케이트를 타며 무디디 무딘 날로 얼음을 지치느라 애를 쓰다 깬 적이 한 번 있었고, 또 한 번은 ② 광폭 타이어 달린 멋진 차를 타다가 차 뒤로 돌아가 보니 뒷 타이어 모두 펑크 나 있는 걸 보고 깬 적이 있다. 두 이미지 모두를 나의 부족한 영성으로 읽는 데 활용하였다. 



그리고 ③ 서로 맞붙은 두 개의 방에 얽힌 꿈을 하나 더 꾸었다. 직사각형인 한 쪽 방에서는 벽에 사람들을 둘러 세우고 하나씩 조준 사격을 하며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고(내가 그런 게 아니다), 계단 식 풀장을 갖춘 정사각형으로 된 바로 옆방에서는 갓난아기를 안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갓난아기를 풀장에 담그자(내가 안았을 것이다) 아기의 머리 뒤를 통해서 붉은 피 같은 것이 물에 퍼져나가는 이미지를 본 것이다. 처음에는 직사각형의 방을 나쁜 교회, 정사각형의 방을 미문(美門)교회 라는 식으로 읽었었다. 그러나 아기 머리에서 퍼져나간 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도 나쁜 것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생명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 하게 되면서 좋아했다. 그렇지만 조준사살을 하고 있는 직사각형 방은 여전히 ‘나쁜 교회’로 규정했었다.

이런 내용을 설교에서 한 후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그 두 방 모두가 나 자신이라는 개정된 방향으로 읽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생명을 배양하려는 나”와 “이성으로 뭔가를 조준하려는 폭력성의 나”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3)


위와 같이 그림을 읽는 방법은 비교적 심리학적인 측면이 농후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이콘(Icon)으로 소개되는 성 카트리나 수도원의 예수상의 경우, 읽을 수 있는 그림으로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두 눈이 짝짝이로 보이는 그 예수님 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과 사랑의 얼굴로 읽히는 그림이다. 이것을 이콘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그들이 사는 집의 실내는 집이 아니라 ‘동물들의 동굴’인 것만 같고, 뼈들이 돌출된 그 그림 상의 인물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야수’인 것만 같은 것도 모두 그 그림을 ‘읽을 때’에 알 수 있는 도상들이다.



(4)


6시를 가리키는 괘종시계를 읽기보다는 그림 그대로만 보다 보니, 그리고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장면을 읽기보다는 그림으로만 보다 보니, 우리는 진정한 종말을 계시로 받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문 이사야서 11장 1-11절은 바로 그런 종말에 대한 대표적인 도상이다.


① 이새의 줄기 한 싹, 

② 입의 막대기(세상을 침), 

③ 입술의 기운(악인을 죽임), 

④ 허리 띠(공의), 몸의 띠(성실), 


등은 모두 심판의 도상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곧이어 평화의 도상도 전개 된다.


⑤ 이리-어린 양, 표범-어린 염소, 송아지-어린 사자, 암소-곰,

⑥ 소처럼 풀을 먹는 야수

⑦ 독사 굴

⑧ 독사 굴에 손 넣는 아이


서로 상반된 쌍이 잇따라 전개 되면서 그 평화를 표명하는 이 이미지를 대개 저 구름 속 하늘나라 이미지로 이해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는 아예 지상천국 이미지로 소개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5)


신약성서 저자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도상(마 3:1-12; 눅 3:1-18)을 통해 이 그림을 읽어나갔다.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도상은,


① 약대 털로 된 옷 (짐승/야수)

② 가죽 띠 (허리띠)

③ 메뚜기와 석청 (먹이) 


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은유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상만 중첩되어도 유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더 결정적인 장면들이 추가 된다. 바로,


④ 독사이다.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친 것을 두고 그 독사들을 나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에는 저 바깥에서 구경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러 스스로 나오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이다.


누가복음에는 아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없다. 세례 받으러 나오는 일반 회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⑨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는

그 알 수 없는 이사야서 본문(11:4)의 해독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심판은 부자나 우쭐대는 자들을 대상으로 해야지 왜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심판하는가?


결국, 이사야서 본문이 지닌 도상은 심판이면서 평화의 잔치인 “세례 문전(門前)”의 도상으로서, 그 직사각형 방의 조준사격이 “나쁜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겨누고 있는 세례와 일반인 셈이다.


구름 속 하늘나라도 아니며, 이 땅에서의 지상천국 유토피아도 아니며,

오로지 ‘회개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6)

 

사람은 이처럼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림과 글씨를 사용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취득할 줄을 안다. 글씨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글씨처럼 읽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읽어내는 이러한 방법은 근대 들어 심리학이나 해석학 분야에서 응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처럼 고대 언어인 성경이 온통 그런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종말론에 등장했던 666, 바코드도 그림이다. 최근의 “베리칩”도 그림이다. 


“괘종시계”, “날 없는 스케이트”, “펑크 난 고급 타이어”, “피의 세례를 준 아기”, “카트리나 수도원의 Icon”, “감자 먹는 사람들”도 모두 다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계시’를 완성하는가는 어디까지나 그 읽기 능력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에필로그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따라서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사야서 본문 상에서 감히 “독사 굴에 손을 넣고 휘저을 수 있었던 아이”가 누구인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이 종말 도상의 궁극적 해석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독사 굴에 손을 넣은 아이가 말한다. “나는 그 분이 아니요, 그 분은 바로 저기 저 분이시다” 라고.




2013.12.8일자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 사 11:1-10. (cf. 시 72:1-7, 18-19; 롬 15:4-13; 마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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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2. 23.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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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오적

오적(五賊)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4호 위반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김지하를 처음으로 감옥에 보냈던 시다. 판소리 형식의 한자어/비속어를 섞어가며 세태를 풍자한 이 시는 <사상계>라는 교양지가 5ㆍ16군사혁명 10주년을 맞아 특집을 내면서 18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해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 특정 사회 지도층들을 한일합방 을사5적에 비유해 비판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담고 있다. 특히 당해에 발생한 ‘3ㆍ1고가도로 정인숙 피살사건’을 정치 사건으로,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를 고위 공직자 부패에 기인한 사고로 묘사했으며, 그 오적들을 잡으러 갔던 포도대장마저 결탁해 이를 고변하는 힘없는 백성들만 도리어 잡아 가둔다는 이야기로 마친다. 당시 2030세대였던 그는 사형선고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사건>과 관련해 재차 구속되어 또 무기징역 형을 살다가 유신정권이 붕괴되고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석방된 이후에는 각 종교의 생명사상을 수용하고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다가 1991년 분신자살 정국에 우파 일간지 조선일보 사설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91.5.5.)는 글로써 분신 정국을 강하게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2012년 11~12월에는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이라는 강연을 통해 대선 후보 박근혜를 사실상 지지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정권 독재자의 딸이다. 그의 커밍아웃이 유리한 정당은 호재로 활용하는가 하면 불리한 정당은 변절이라고 폄하하는 등, 극단의 평가로 갈리고 있다.


프린서플 | 변절인가 변화인가

우리는 변화하는가 변절하는가? 우리 사회는 변절하지 않는 것을 최고 미덕 가운데 하나로 올려다 놓고 추앙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또 구태라며 규탄 합니다. 변하라면서 변치 말라는 셈입니다. 이 모순된 이중성을 사회적 세대 간의 이행에서 주로 만나게 되며, 한 가족 속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딸 세대 간의 이행에서도 만나며, 심지어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양날의 계시 속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각각의 생명을 잉태하고서는 서로 알아보고 축복하는 장면을 통해서는 그 세대 간의 이행 순리가 어떤 것인지 잘 말해줍니다. 


둘은 같으면서도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는 서로 맞닿아 있는 ‘율법과 복음,’ 두 세대를 표징합니다(눅 16:16; c.f. 마 11:11-13). 그래서 둘은 출생의 때로부터 그렇게 같으면서도 달랐습니다(1:5-25, 26-38). 요한의 부모는 나이 많아 아이가 없지만(vv. 5-10) 예수님의 부모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vv. 26-27). 수태계시가 양쪽 모두 천사에 의해 전해지지만 한 편은 아버지 사가랴에게(v. 12-13) 다른 한 편은 모친 마리아에게 전해집니다(v. 29-30). 그리고 그 천사가 전자에게는 나타났고(v. 11) 후자에게는 들어가(v. 28) 전합니다. 아울러 무엇보다 사가랴에게는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v. 15) 마리아에게는 ‘주 앞에서’가 아닌 “그가 큰 자가 될 것”(v. 32)이라 말합니다. 양자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만 앞과 뒤는 명확히 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갈립니까?


이전 세대가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의 어머니로 알아보고 자기 복중에 있는 요한이 뛰어놀 정도로 기뻐한다고 증언합니다. 실제로 그는 성인이 되어 회개케 하는 사역을 선행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는 말로써 새로운 세대를 수용하고 적극 예고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인 것입니다.


두 세대가 생명이라는 주제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두 세대의 만남은 이미 태중 곧 여성성 속에서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남성에 대비된 성으로서 여성성이 아니라 생명의 공간으로서 여성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축복이 무병장수의 기원 같지만 사실 요한과 예수 양자 모두는 곧 죽을 운명으로서 하나 됩니다. 현대 웰빙 식의 생명이 아닙니다. <큰 자>의 죽음은 만인을 살리는 죽음으로, <주 앞에서 큰 자>의 죽음은 그 만인을 위한 생명 사역의 길을 예비하는 죽음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두 다른 태의 생명이 만나서 서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수많은 세대교체가 발생합니다. 선배와 후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특정 세대 정권과 그 다음 세대 정권이 어떤 형태로든 교체를 야기 시킵니다. 여기서 변화가 충족되지 못한 교체는 구태로 판정 당하고,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변화는 변절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세대교체의 형식과 과정들이 가져오는 이 같은 모순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변화는 오로지 <화해>를 동반하는 변화뿐입니다. 화해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김지하의 오적(五賊)에서 <생명>까지.

그런 점에서 김지하의 커밍아웃은 확실히 ‘변화’ 맞습니다. 그의 변화된 텍스트에는 생명과 화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거역하는 세력을 지칭할 때 쓰는 ‘수구’란 말이 최근엔  단지 노인층을 겨냥한 전용어가 되어 버린 상태지만, 설령 그들이 젊다하더라도 노인 김지하처럼 생명을 향한 부단한 변화가 없다면 변치 않는 그들이 도리어 수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이미지 출처:

http://www.ahammalgul.com/?document_srl=1354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52053081

http://pasanetworkusc.blogspot.kr/2012/09/pasa-network-executive-board-election.html

http://www.hanscomfamily.com/2010/05/31/today-in-history-105/

http://aesaintsoftheday.blogspot.kr/2010/06/nativity-of-st-john-baptist.html

http://jamestabor.com/2009/12/

http://charmedyoga.com/tag/freedom/

http://educationworksonline.wordpress.com/2010/01/12/education-and-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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