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2. 23. 03:47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임마누엘>이지만 임마누엘이 지닌 맥락을 정확히 알고 쓰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것이 권위 있는 한 예언자 <입>을 통해 계시된 줄은 알지만, 악한 어떤 왕의 <귀>를 통해 계시된 사실도 다 배제된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릴 적부터 슬픈 날과 맞붙은 기쁜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3일 전인 22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의 설레임을 다 만끽할 수 없었다. 22일 동안은 우울함과 동행하다가 3일간만 설렐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는 누구에게나 부모의 추도일이란 게 그렇듯이 불효에 대한 회상과 동행하다가는 크리스마스의 설렘은 잠시만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임마누엘>을 이해하는데 남다른 도움을 주었다.


(1)


<임마누엘>을 최초로 계시 받은 그 악한 왕이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말한다. 열왕기 역사가와 역대기 역사가 모두가 악으로 지목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악이란 게 우상숭배를 말하지만 독특하게도 그는 이방 나라의 제사 단상의 디자인을 들여와서는 똑같이 따라 만든 인물이다. 그렇게 제단의 식양을 들여옴으로 기존의 제사 도구나 식양들은 다 구석에 처박아 둔 죄를 지적당하고 있다(왕하 16; 대하 28).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는 일종의 역사 기록물이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팩트만 기록하고 있다. 즉 지극히 역사가적인 필치로만 기록하다보니 사법적이면서도 - 심판 받듯 - 여타 이야기 플롯이 그냥 묻힌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 이사야서에 바로 그 묻힌 플롯이 묻어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그에게 전달하기를, “너는 징조를 ‘깊은 데에서든’ ‘높은 데에서든’ 구하라”(사 7:11)고 하였는데 그의 대답이 독특하다.


나는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12절)   



얼핏 들으면 믿음의 격식을 갖춘 말 같지만 직역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대써요!” 이다. 과격하게 하나님을 배격하지는 않지만 완강하게 그것을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은 플롯, 즉 우리의 삶과도 같은 것이다.


(2)


(열왕기/역대기와 같은) 역사가의 사법적 - 심판주的 - 진술과는 달리 이사야 선지자에게서는 이 악한 왕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계시되고 있다. 포기하지 말고 징조를 구하라는 것이다.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자포자기 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여기서 일방적으로 <임마누엘>을 강권하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윗 가문의 일원에게 주어지는 기회인 것이다.  


(3)


몇몇 빼고는 워낙 악명 높은 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하스 같은 왕은 기억에서 사라지면서 그 <임마누엘>이라는 기호도 그냥 묻힐 뻔하였다. 그것을 살려낸 것이 바로 신약 공동체, 그 중에서도 마태라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 임마누엘이라는 기호를 천사의 <입>을 통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귀>를 통해 복원해냈다(마 1:18-25).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아하스의 귀를 통해 계시된 기호였음을 상기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처지는 바로 그 아하스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 남성은 위대한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일 뿐이다(막 1:16). 아무도 다윗 왕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잠들어 있을 뿐이다(마 1:20, 24).


(4)


우리의 우상숭배는 어디 으슥한 점치는 곳에 들어가 점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쇠함이다. 희망 없음이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음이 바로 우상숭배다. 아하스와 요셉의 영적 상태에 부쳐 더 구체적으로는 어떤 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가문에 대한 상실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어머니)의 아들(딸)인가? 아니면 단지 어떤 목사인가? (아니면 어떤 직장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녔던 희망을 상실할 때 우상숭배인 것이다.



(5)


아하스가 “나는 도무지 구하지 않겠나이다-” 하는 것처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잠들어’ 있을 때,


이사야가 <임마누엘>을 계시한 것처럼,

천사가 <임마누엘>을 계시한다.


그러면서 “마리아를 데려와라!”고 주지 시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리아를 주저하지 말고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싫은 표정으로 마치 잠든척 하고 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도상(圖像)이다.


(* 그러므로 요셉의 저런 표정이 대부분의 <요셉의 현몽>도상을 주도하는 이유이다.)




에필로그 | 임마누엘의 기원


임마누엘( עמנואל / Immanuel).

임(with) + 마누(us) + 엘(El)

이 복합 단어 중에 El 보다도 중요한 게 바로,

”(Im/with/עמ)이다.


왜냐하면 야웨라는 하나님의 궁극적 성명의 기원 동사가 되는 “하야”(to be)에 얽힌 그 모든 시제 즉, 과거(was), 현재(is/is-ing), 미래(will be)를 담고 있는 전치사가 바로 ”, “함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이름도 이 기원 아래서 도출되어 나온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2013.12.22. 대강절4주차 | 임마누엘에서 가장 중요한 것 | 사 7:10-17; 마 1:18-25, (cf. 시 80:1-7, 17-19;  롬 1:1-7.)


  


'말씀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은 자(remnant) 인플레이션  (0) 2014.01.06
때(a time)가 있다.  (0) 2014.01.02
어떻게 사막화가 되는가  (0) 2013.12.16
노아의 방주의 본말  (0) 2013.12.02
앙갚음을 끊는 길  (0) 2013.11.27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2. 16. 09:40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는 본문을 설교하려다 보니 내 자신이 교회를 <사막화>시킨 부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단계를 통하여 나는 한국교회의 사막화에 일조한 일면이 있다.

 

(1) 전통교회를 비판하면서


1-2세대 부흥사들은 천막집회 등지에서 신유와 이적 등 강력한 은사를 통해 먹고 살길 막막했던 민족을 위로하고 일깨워 그들의 영육이 성장할 수 있게 했지만, 말년에 그들은 자기교회를 구축하고 축재하거나 형편없는 자손에게 교회를 부(富)로 물려주었고, 신도들은 자기 일가에 맹종하는 맹목적 신자로 전락시켰다. 이런 논조를 골자로 비판의 날을 세워왔으나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신유와 이적을 실행하기엔 역부족인 나 자신의 영성을 변증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2) 신흥 자본교회를 비판하면서


한 대표적 신흥교회의 VIP Room(새신자 영접실)을 방문했을 때 그곳 담임 목회자로부터 이런 노하우를 들었다. “‘우리 교회에 오려면 이 정도는 돼야한다’라는 암묵적 코드를 지역 주민에게 심어준다.” 이후 나는 이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자본교회들이 얼마나 세속화 되었는지를 고발하면서 “그렇다면 노숙자들은 어쩌란 말이냐? 노숙자들은 이 화려한 VIP Room에 들어오지 말라는 코드냐?”라며 힐난하였다. 


(3) 한 지방 교회에서 근무하면서


그러다가 지방의 한 교회에서 근무할 당시 정말로 한 노숙자가 예배드리러 왔다. 나는 그의 곁에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의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예배 내내 내 머리 속은 온통 ‘다른 새가족이 시험 들면 어쩌지?’라는 생각으로부터 ‘만약 내가 단독 목회하는 교회라면?’이라는 공상에 빠져 ‘저런 분이 오면 어떻게 대처하지?’라는 상상이 급기야 ‘우리 교회에 오려면 이 정도는 돼야한다-’라는 암묵적 코드로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4)


나의 경험을 예시로 한국 교회가 사막화 된 일면을 예시할 수는 있었지만, 내가 그 <사막화>를 어떻게 돌려놓을 수 있는지를 설교하기에 막막했다. 그래서 이런 주제로 금주에 설교를 하지 않을 생각도 하였다. 그런 패배감에 젖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음 몇 가지 사막화를 저지하고 비구름을 불러들일 수 있는 나의 경험을 환기시켰다.


(5) 


나는 원천적으로 ‘일천번제예물’이라는 비성서적 행위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새벽마다 그것을 실행하는 노인들의 헌금봉투를 받아들고서는 내 이성이 깨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체험을 토대로 나는 내가 가진 신학과 지식을 걸고 그 할머니들의 정성어린 신앙을 수호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의 요약은 다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천번제도 비성경적이다. 송구영신도 비성경적이다. 송구영신에 말씀 뽑기(?)도 비성경적이다. 그럼 성경적인 건 무엇인가? 유대적인 것? 유대인들이 준수했던 바로 그것? 중세교회적이지 않은 것? 한국적이지 않은 것? 이른바 성경적인 사람들은 뼛속까지 유대인 같은가? 우림과 둠밈은 뽑기 아니고 뭐였던가? 옛것은 보내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신앙은 너무나도 지극히 성경적이며 말씀을 뽑는다는 행위도 신점으로 뽑는 행위라고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그 뽑은 말씀대로 “살며,” “준행 하겠다”는 의지로서 예언적 말씀을 가르치면 그것이 성경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는 신점대로 어찌어찌 하다 보니 십자가에 달린 자인가 아니면 신점으로 뽑힌 그 모든 갈망 담긴 말씀들을 의지를 사용해 모두 준행한 준행자인가? 이것이 예언의 본질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 그 “성경적인 자”들 지론에 의하면 504번째 비성경적인 예물이 있다. 이 분의 기도제목은 한결같다. 504번째를 지나도록 한결같다. “주님 아시지요” 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4:10-11) 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읽어도 자꾸 까먹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쓰러울 따름이다. 형식은 질료를 담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막화>를 저지할 수 있는 첫 번째 예시이다.


(6) 


지방 교회의 새벽 기도는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시며 그들의 기도란 것이 거의 ‘탄식’ 그 자체일 뿐이다. 눈물샘도 마른 노인들의 탄식은 편견과 도그마를 깨뜨렸다. 그 무엇으로 노인을 구원할 수 있을꼬.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중에 매일 새벽에 30분을 걸어오는 수족이 불편한 분이 계셨는데 감사절기의 하루였던 어느 날 헌금함 앞에 서서 어깨에 둘러맨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한참을 낑낑 거렸다. 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꺼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것을 꺼내 드리다가 그 봉투에 쓰인 액수를 보고 말았다.


나보다 적은 액수였다. 그렇지만 새벽마다 5분이면 걸을 거리를 새벽마다 30분 걸려서 걸어오고, 게다가 주일 점심식사는 식판을 들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주일 남의 신세 지기는 싫고 그래서 그냥 점심식사를 안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수고로움과 불편함을 생각하면, 내 것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고 부끄러워서 그대로 올려놓지를 못하고 거두어들여 헌금을 더 넣을 수밖에 없었다.


(7)


그리고 끝으로, 생각해보니 나는 성공적으로 노숙자를 돌보지는 못했지만, 수십 년간 새벽과 철야 기도로 예배당을 지켰지만 말년에 우울증을 맞아 고통 받던 한 노인 권사님을 몇 개월 심방한 일이 있다. 그 노인에게서도 냄새는 났다. 나는 그런 일을 잘 못하는데 마음을 바쳐 성심껏 실행했다. (참고로 나는 담임목사가 아니었으며 담임목사가 지시한 일도 아니었다.) 성탄과 송구영신에 즈음하여 남편 되시는 장로님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목사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사실 나는 내가 부교역자로 있는 교회마다 연말이면 유복한 분들이 돌리는 각종 선물들이 있게 마련이었은데 받지 않았다. 아니 안 받을 수는 없으니 받고서는 집으로 가지고 오지 않고 교회에서 바로 어려운 분들을 나눠 주었다. 어려운 분들을 생각하는 마음 보다는 아마도 별로 귀감이 되지도 않는 그들의 선물을 내다 버리고 싶은 못된 마음이 더 컸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난한 이 노부부의 봉투를 받아들고는 실로 마땅함과 말할 수 없는 연민과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중량감으로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척 하면서 한참을 눈물 짓고 말았다.


(8)


<사막화>를 저지할 수 있는 그것은 외국의 신학 이론도 아니요, 어떤 화려한 마케팅 테크닉도 아니요, 가장 말석에 앉은 저분들이 물려주는 신앙 유산이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하게 되면서 금년 성탄 대강절을 희망차게 지나가고 있다.  




에필로그 | 사막화에서 옥토화


과학자들은 사하라 같은 광활한 사막이 사막화 된 과정을 발견했다. 그것은 비가오지 않기 때문에 사막화가 된 것이 아니라 토지의 나무를 제거해버림으로 말미암아 비구름을 불러올 수 없었다는 학설이다. 나는 이 학설을 믿는다. 

심긴 것을 제거하면 사막화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고 키워내면 다시 비구름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2013.12.15일자 설교 | 어떻게 사막화 되는가 | 사 35:1-10. 마 11:2-11 (cf. 눅 1:47-55; 약 5:7-1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카테고리 없음2013. 12. 9. 09:45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나는 과거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을 당시 세상에 곧 종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 꿈이 헛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 후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꿈에서 인식되곤 했지만 전과는 달리 그것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읽다보면’ 당초 전제된 심상과는 전혀 다른 뜻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주로 계시로 인준하는 편이다. 


(1)


과거 종말론이 전국을 강타했을 당시 대부분의 집회에서는 이 노래가 빠지지를 않았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 ... 사막이 낙원되리라 //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즈음 어느 날인가 꿈에 보이기를, 정각 6시를 가리키는 한 대형 괘종시계가 보이더니 “이제 곧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생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시한부 종말론 서적에서 나오는 식으로 나도 뭔가 신령한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며 사람을 대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2)


미문(美門)을 시작한 이후 꾼 의미 있는 꿈은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① 날이 서지 않은 스케이트를 타며 무디디 무딘 날로 얼음을 지치느라 애를 쓰다 깬 적이 한 번 있었고, 또 한 번은 ② 광폭 타이어 달린 멋진 차를 타다가 차 뒤로 돌아가 보니 뒷 타이어 모두 펑크 나 있는 걸 보고 깬 적이 있다. 두 이미지 모두를 나의 부족한 영성으로 읽는 데 활용하였다. 



그리고 ③ 서로 맞붙은 두 개의 방에 얽힌 꿈을 하나 더 꾸었다. 직사각형인 한 쪽 방에서는 벽에 사람들을 둘러 세우고 하나씩 조준 사격을 하며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고(내가 그런 게 아니다), 계단 식 풀장을 갖춘 정사각형으로 된 바로 옆방에서는 갓난아기를 안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갓난아기를 풀장에 담그자(내가 안았을 것이다) 아기의 머리 뒤를 통해서 붉은 피 같은 것이 물에 퍼져나가는 이미지를 본 것이다. 처음에는 직사각형의 방을 나쁜 교회, 정사각형의 방을 미문(美門)교회 라는 식으로 읽었었다. 그러나 아기 머리에서 퍼져나간 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도 나쁜 것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생명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 하게 되면서 좋아했다. 그렇지만 조준사살을 하고 있는 직사각형 방은 여전히 ‘나쁜 교회’로 규정했었다.

이런 내용을 설교에서 한 후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그 두 방 모두가 나 자신이라는 개정된 방향으로 읽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생명을 배양하려는 나”와 “이성으로 뭔가를 조준하려는 폭력성의 나”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3)


위와 같이 그림을 읽는 방법은 비교적 심리학적인 측면이 농후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이콘(Icon)으로 소개되는 성 카트리나 수도원의 예수상의 경우, 읽을 수 있는 그림으로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두 눈이 짝짝이로 보이는 그 예수님 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과 사랑의 얼굴로 읽히는 그림이다. 이것을 이콘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그들이 사는 집의 실내는 집이 아니라 ‘동물들의 동굴’인 것만 같고, 뼈들이 돌출된 그 그림 상의 인물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야수’인 것만 같은 것도 모두 그 그림을 ‘읽을 때’에 알 수 있는 도상들이다.



(4)


6시를 가리키는 괘종시계를 읽기보다는 그림 그대로만 보다 보니, 그리고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장면을 읽기보다는 그림으로만 보다 보니, 우리는 진정한 종말을 계시로 받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문 이사야서 11장 1-11절은 바로 그런 종말에 대한 대표적인 도상이다.


① 이새의 줄기 한 싹, 

② 입의 막대기(세상을 침), 

③ 입술의 기운(악인을 죽임), 

④ 허리 띠(공의), 몸의 띠(성실), 


등은 모두 심판의 도상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곧이어 평화의 도상도 전개 된다.


⑤ 이리-어린 양, 표범-어린 염소, 송아지-어린 사자, 암소-곰,

⑥ 소처럼 풀을 먹는 야수

⑦ 독사 굴

⑧ 독사 굴에 손 넣는 아이


서로 상반된 쌍이 잇따라 전개 되면서 그 평화를 표명하는 이 이미지를 대개 저 구름 속 하늘나라 이미지로 이해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는 아예 지상천국 이미지로 소개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5)


신약성서 저자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도상(마 3:1-12; 눅 3:1-18)을 통해 이 그림을 읽어나갔다.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도상은,


① 약대 털로 된 옷 (짐승/야수)

② 가죽 띠 (허리띠)

③ 메뚜기와 석청 (먹이) 


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은유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상만 중첩되어도 유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더 결정적인 장면들이 추가 된다. 바로,


④ 독사이다.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친 것을 두고 그 독사들을 나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에는 저 바깥에서 구경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러 스스로 나오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이다.


누가복음에는 아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없다. 세례 받으러 나오는 일반 회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⑨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는

그 알 수 없는 이사야서 본문(11:4)의 해독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심판은 부자나 우쭐대는 자들을 대상으로 해야지 왜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심판하는가?


결국, 이사야서 본문이 지닌 도상은 심판이면서 평화의 잔치인 “세례 문전(門前)”의 도상으로서, 그 직사각형 방의 조준사격이 “나쁜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겨누고 있는 세례와 일반인 셈이다.


구름 속 하늘나라도 아니며, 이 땅에서의 지상천국 유토피아도 아니며,

오로지 ‘회개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6)

 

사람은 이처럼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림과 글씨를 사용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취득할 줄을 안다. 글씨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글씨처럼 읽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읽어내는 이러한 방법은 근대 들어 심리학이나 해석학 분야에서 응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처럼 고대 언어인 성경이 온통 그런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종말론에 등장했던 666, 바코드도 그림이다. 최근의 “베리칩”도 그림이다. 


“괘종시계”, “날 없는 스케이트”, “펑크 난 고급 타이어”, “피의 세례를 준 아기”, “카트리나 수도원의 Icon”, “감자 먹는 사람들”도 모두 다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계시’를 완성하는가는 어디까지나 그 읽기 능력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에필로그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따라서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사야서 본문 상에서 감히 “독사 굴에 손을 넣고 휘저을 수 있었던 아이”가 누구인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이 종말 도상의 궁극적 해석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독사 굴에 손을 넣은 아이가 말한다. “나는 그 분이 아니요, 그 분은 바로 저기 저 분이시다” 라고.




2013.12.8일자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 사 11:1-10. (cf. 시 72:1-7, 18-19; 롬 15:4-13; 마 3:1-12.)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2. 2. 05:44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 매장되었다며 찾아 헤매는 노력은 실로 허망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방주가 지닌 '본말' 보다는 그것을 채증해보이겠다는 '과학'에 대한 맹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맹신은 대개 방주를 축조해낸 한 ‘가정의 이야기’라는 본말 대신에 그 방주의 크기에 더 관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발굴한 방주가 생각 보다 작으면 어쩌려고? 아니 이미 발견했지만 생각보다 작아서 죄다 내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1)


우리나라 경인운하에 <아라뱃길>이라는 유람선 코스가 지난해 5월에 생겼다. <아라>라는 말은 <바다>의 옛말로 소개되었지만 그것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순수 우리말인 <알/아라>가 “아주 넓고 큰 곳”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바다>의 옛말로는 <바랄>이 있기 때문이다.


(2)


<아라>는 히브리어로는 땅이라는 뜻이다. 흙으로서 땅(에레츠)이라기보다 세계/세상이라는 의미로서 땅이다. 하나님 은총의 부재는 줄곧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지는 혼돈으로 나타났다가(천지창조, 노아의 홍수, 홍해...etc), 은총이 임할 때 다시 그 경계가 생겨나곤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아라랏>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땅과 물의 경계인 그 방주(Ark)가 떠돌아다니다가 정박한 산의 지명일 수 있지만, 아라랏이라는 의미 자체에 담긴 노아 가족의 산행(山行)은 이미 세상과는 구별된 항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 <아라>라는 음소에 담긴 의미가 이와 같은 ‘바다’라는 빠롤을 품고서 우리나라의 랑그에게까지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라뱃길...


(3)


나는 아르메니아의 한 도심에서(Armenia Kotayk) 바라본 아라랏 산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고서는 그 산 자체가 마치 방주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대에도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만약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가 그 산과 일체를 이룬 그 어떤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거세게 몰아닥치는 홍수를 항해했던 그 방주는 바로 그 산(山) 자신일 수도 있었겠다는 극히 실존론적 결론에 다다른다. 


노아의 신통력이 현대식 잠수정을 만들었을 것으로 기대하는 현대인과 몇몇 과학자들의 이상한 상상력을 무참히 파괴하는 논지라 미안하지만, 바로 이 방주는 그 <아라>가 가진 기원에 더 충실하다.


<아라>는 땅인가? 바다인가? 아니면 땅이면서 바다인가?


이리하여 노아의 방주는 "더럽혀진 '땅'을 항해했다"는 음소(音素)가 지닌 본말의 탈환이 이루어진 셈이다.


(4)


게다가 이러한 음소의 탈환은, 노아의 방주가 1년여를 떠돌다왔는데도 출항했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돌아와 정박한 것만 같은, 다소 당혹스런 대목을 (잠수정을 그려가며 해명하려는) 창조 과학자들보다 더 잘 설명한다.


그렇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그 자리에 고정된 채 1년을 항해했을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산에 고정된 방주가 급한 물살들을 항해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5)


이 음소 탈환의 목적은 과학이 수여하는 헛된 망상을 제거하고 그 이야기의 본말에 관심케 하기 위한 일종의 기도(企圖)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본말은 이렇게 전하신 바 있다.


(가) 홍수전에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다. (마 24:38)성경은 방주의 실측 크기를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의 본말은 노아의 가족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 보다 본말은 거기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38b절)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음만 보고 결혼하던 혼잡과 그 시대 자체의 폭력성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라는 평범한 일상으로 주석하셨다. 즉 구별이 없었음이 본말인 것이다. 

(다) 홍수가 나서 모두 멸망하면서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39절)당시에는 비라는 것이 오지를 않았다. 성경은 안개만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5).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재앙의 전조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경험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경험을 우선시 하는 믿음은 계시를 믿지 않는 태도의 기본 양식이며, 그런 태도는 물이 목까지 차오를지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인식의 마비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법.


(6) 


방주는 한번도 배(ship/오니야)였던 적이 없다. 성서는 배라고 하지 않고 시종일관 방주(테바)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잠수함’이라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Box(궤)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 궤는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을 담은 용기였으며, 시온 산 예루살렘에서도 그 용기에 그렇게 담아두었다(cf. 사 2:3). 


여기 아라랏 산이 그 가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에필로그 | 공학적 상상력 Vs. 문학적 상상력


이와 같은 상상력은 노아의 방주를 현대식 잠수정으로 설계하고 재현해내는 공학적 상상력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종의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해두자.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창조과학과 같은 식의) 공학적 상상력에 더 내맡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만약 도킨스(Richard Dawkins)와 같은 사람을 만나 논쟁을 하다가 말문이 막히거든 바로 그 때, 이 문학적 상상력을 한번 꺼내보시기를-.

 



* 2013.12.1일자 | 노아의 방주의 本말 | 마 24:36-44. (cf. 사 2:1-5; 시 122; 롬13:11-14.)



* 이미지 참고: http://www.doopedia.co.kr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