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4. 1. 2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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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앙은 모두 ‘관계’ 속에서 창설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중동 국가에서 발생한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느닷없이 뚝 떨어진 걸 믿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관계’ 속에 기원을 둔 바로 그것입니다.  


가인은 자기문명을 창설한 자로서 대명사가 되었지만 아벨을 죽인 형으로서 존재합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해 마땅한 지명(地名)으로 회자 되지만 그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로서 존재했고 거기에도 ‘관계’란 게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국가요 민족이요 땅의 이름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 역경을 관계로 담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12아들들의 ‘관계’ 속에서 궁극적인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관계란 것이 누구는 에발산에 세우고 누구는 성산인 그리심산에 세우면서 심화되고, 또 굳어집니다. 그 갈림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이들이 바로 에발산에 도열한 자들인데, 하나 같이 열등합니다. 하나같이 서자들입니다. 르우벤은 서자가 아니었지만 타락한 자입니다. 그러면 혈통이나 도덕성이 기준인가? 그렇다면 스불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서자도 아니고 르우벤 같은 명시적 타락도 없었으니까.


분명 성경에는 한 공동체 내에서도 서열을 가르려는 강력한 노선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한 마디로 파격적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안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과연 당대에 이 예언이 받아들여졌을지 의문이지만 그리스도의 주된 사역지가 바로 이 지역이 됩니다(마 4:12-17).


이사야는 매우 구석구석 다양한 분야를 디테일하게 예언한 예언자인데, 그가 그 시절에 벌써 12아들들 가운데 이름도 거의 외워지지 않는 스불론과 납달리를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초대교회가 이 예언을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둡고 그늘진 곳을 비추신 분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시지만, 초대교회 성경 편찬자들은 하나 같이 그리스도를 비춰낸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들입니다. 


어두운 곳을 비추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모할 것이지만, 나는 특별히 그리스도를 비춰낸 그 성경 편찬자들을 사모하고 닮기를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에필로그 | 이름과 땅.


우리는 서로를 ‘영남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호남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아니면 ‘충청도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서울 사람이라고 불리면 나은 편입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됨을 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오래되면 민족이나 국가 이름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땅의 이름으로 굳힙니다. 바로 그 땅이 그 사람의 기질을 담는 이치이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우리는 땅, 즉 흙으로 지어진 존재이며 우리의 이름이 아다마(흙)에서 온 아담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부득이 땅과 더불어 살아가고, 그 땅의 기질을 받아 타고나지만, 그 움직일 수 없는 기질이더라도 오직 그리스도가 비추시는 성령일 때 빛으로 해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늘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2014년 1월 26일자 |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 | 사 9:1-8; 마 4:12-23, (cf. 시 27:1, 4-9;  고전 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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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4. 1. 1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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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사 49:1-3)

이와 같이 한껏 용기를 북돋는 선포를 받고도 이스라엘의 응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사 49:4)


이러한 소회는 구원의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간혹 침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 신앙 일상과 닮았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어떤 목적(물)이 좌절 되었을 때에 주로 그렇지만 진정한 불행의 인식은 자신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를 때에 심화되게 마련이다. 


불행은 어떤 한 사물이나 사람, 혹은 환경으로 인해 닥치는 ‘요인’이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거나 중복될 때 우리는 인식의 미아가 되고 그렇게 되고나면, 앞서 좌절의 그 원인은 사라지고 ‘불행’이라는 상태만 남는 원리이다. 


즉 자신의 시작, 중간, 끝, 이들 세 매듭을 놓친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회개이다. 회개는 우리가 잠긴 인식의 마비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그것이 첫 번째 관문이라는 점에서 - 이다. 회개는 일종의 급전(unexpected)이기 때문이다. 돌이킴이기 때문이다. 시작과 중간과 끝의 방향감각이 없어 인식의 미아가 된 상태에서 방향감각을 무엇으로 복원할 수 있겠는가? 돌이킴 아니겠는가


다음은 창조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는 과학에서 말하는 식의 창조가 아니라 - 지구과학, 생물학 같은 - 모태의 기억으로서 창조를 말한다. 예컨대 어머니의 태중에서 안락함이나, 어머니 품속에서의 안락함은 같은 것이다. 또 성인이 되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의 안락함도 같은 회복력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어나기도 전부터 “알았다”, “지으셨다”는 사실의 인식으로써 안락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좌절을 철회할 힘도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기원을 인식해냄으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원리이다. 



에필로그 |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begotten) 사람일 때 가능한 얘기이다.



[* 포인트: 우리의 침륜이 회복될 때 아무것으로나 회복하는 게 아니라 <창조>로 회복해야 하는 당위성에 관한-]


2014.1.19일자 |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 | 사 49:1-7, (cf. 시 40:1-11;  고전 1:1-9; 요 1: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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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4. 1. 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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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목사님은 좌파일까? 우파일까? 이 시대 목사에게 자신의 이념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는 일은 일종의 커밍아웃에 준하는 부담스런 일일 것이다. 자기 교회 신도 절반은 잃을 테니-


나의 경우는 이념성애자에 가까운 어떤 목사들이 성령세례 보다는 자신이 받았던 이념세례를 더 추앙하면서도 정작 자기 목회에서는 자본적 양식에 철저한 것을 눈뜨고 보기 힘들어 하는 편이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우경향의 목사가 확실하지만, 반대로 설교에서 공공연하게 “한나라당 안 찍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떠벌이는 부흥강사 데려다 강단에 세우는 멍청한 교회나 목사 또한 전자만큼 혐오하는 것도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것은 라틴의 교황이지만 그 전쟁을 선동하고 돌아다닌 것은 일종의 전도자 즉 부흥사들이었다. 이때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 십자군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약탈>을 보장 받았다.


믿음이 충만한 이들은 대개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이등의 기사계급, 장사꾼, 기근에 쩔은 일반 계층.., 등등 모두가 ‘결핍과 이익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부류들이었다. 이 시대처럼.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마 학살일 것이다.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유대인까지 학살했다. 이슬람교도를 아무런 가책 없이 식량으로 사용한 보고도 있는 것 같다. 아울러 이들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 콘스탄티노플까지 점령해 들어가 라틴 교회 십자가를 꽂았다. 그것이 진정한 목적일 것이다.


나는 내가 지닌 역사관으로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최근 비평해본 일이 있는데, 일개 목사로서 아마추어적 중도 사관을 십자가 정체성으로 치환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한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참조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702813303084425)


우리 목사님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십자군 전쟁의 결과를 <르네상스>로 진입하게 된 계기로 치적하는 것은 마치 일제 강점기 덕에 우리가 근대 개화기로 진입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십자군 전쟁의 결과는 오로지 <안디옥 교회> 발상지였던 터키 땅의 99% 이슬람화로 관심한다.


지척에 있는 아르메니아는 99%의 그리스도교를 유지하고 있는데 왜 이 땅은 이슬람화 되었는가? 이슬람교(오스만)의 권능인가? 십자군의 십자가 권능인가?


안디옥 교회는 우리가 믿고 있는 스타일의 복음을 전해준 사실상 ‘처음 교회’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감시만 하고 앉았었다. 예루살렘 교회를 제외하고, 안디옥 교회를 필두로 하는 모든 초대 교회들이 교회를 재생산했다. 그런 안디옥 교회의 성지가 이슬람화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안디옥 교회의 땅(지금의 터키)이 이슬람화 되어서는 그리스도교 나라인 아르메니아에 박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 150만 명 정도의 새로운 학살이 발생하였다.


안디옥 교회의 땅이 십자군에 짓밟힌 것이나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당한 것은 다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잔의 비극은 우리나라 4.3제주, 5.18광주, 6.25.., 크고 작은 모든 상잔의 비극과 같은 형식의 것이다.


우리 목사님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좌(左)와 우(右)는 정의에서 비롯된다. “자, 이리나와 정의의 칼을 받아라-”인 것이다.


성서 본문은 바로 그 정의(正義)가 깃드는 공간을 지목하고 있다. 그곳은 바로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 있는 곳이다.


학도병 <이우근>과 <이승복>은 ‘남한의’ 순교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순교자이다. 우리 모두의 “상한 갈대”, 우리 모두의 “꺼져가는 등불”이었던 것이다. 그 순교자가 이우근인지 저우군인지, 이승복인지 저승복인지.., 그 진위를 밝혀내는 것만이 역사적인 작업은 아니다. “꺼져가는 등불”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공감하는 것이 더 역사적인 것이다. 그 갈대와 등불은 제주에도 있었고 광주에도 있었고, 안디옥 교회나 콘스탄티노플에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렸던 것이고-. 


토론의 달인이 된 파계승과도 같은 목사 아들이 유명인이 되어 TV에 나와 대개 이런 것을 ‘성급한 일반화’라고 가르치지만 이것은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라 피값들을 다 톡톡히 치른 ‘보편화’이다. 결코 거저 된 게 아니다. 



에필로그 | 피가 중요한가 그 피의 혈액형이 중요한가.


우리 목사님이 좌파인가 우파인가를 알아내려면 그 목사가 그리스도의 피를 밝히려고 하는지, 아니면 그 피의 혈액형을 밝히려고 하는 지를 보고 분별할 수 있다.



* 2014.1.12일자 | 정의(正義)는 어디에 깃드는가. | 사 42:1-9, (cf. 사 42:1~9; 시 29; 행 10:34~43; 마 3:13~17.)

* 이미지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6444


[이 사진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p. 313에 이우근의 사진으로 실린 것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계절 등의 이유, 그리고 친족의 폭로로 이우근이 아니라 국군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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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4. 1. 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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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 주제들이 여럿 있지만 남은 자(remnant)라는 개념도 그 중 하나다. Kjv 기준으로 약 92회가 사용된다. 다음은 그 주제가 도출되는 주요 모티프들이다.


(1)


우선 노아는 홍수에서 남은 자였고(창 6:5-8; 7:1, 23), 롯은 소돔 멸망에서 남은 자였으며(창 18:17-33, 19:1-29), 모세는 남아(男兒) 살해 정책에서 남은 자였다(출 2:1). 그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출애굽 1세대 중 남은 자였다(민 14:29-30). 세월이 흘러 이교도 우상의 제단이 횡횡한 엘리야 때에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7천이 남겨진 바 있다(왕상 19:18). 


(2)


그러나 무엇보다 궁극적인 적용은 후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후 돌아온 귀환자 공동체를 ‘남은 자’로 규정하는 신학일 것이다(슥 8:6, 11, 12). 특히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 속에서 이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50:20, 42:2). 예레미야는 이것을 메시야 시대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23:3; 31:7). 


(3)


그렇지만 그들이 포로로 끌려 갈 당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4:14)는 표현이나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왕하 25:12; 렘 52:16) 라는 식의 표현은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남은 자들과 본토에 남겨진 자들 간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주요 맥락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이데올로기의 파괴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인 바울도 그런 화해의 견지에서 적극 수용하고 있다(롬 9-11장). 


(4)


현대적 의미의 남은 자(remnant) 사상은 대개 어떤 이단들의 멤버쉽이나 종교이익집단들의 이데올로기로 가히 인플레이션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실생활 관계 속에 적용됨이 보다 종말론적 원형에 가까운 현대적 의미이다.


이의 적용을 위해 2006년경 학위 논문에 기록했던 <감사의 글>을 떠올려 공개해야만 했다. 거기에는 내가 감사해야 했던 인물군(群)이 세 개 그룹으로 요약되어 등장한다. (1) 은사군 (2) 재정 후원자군 (3) 현장 후원자군-.


하나님 알아가는 학문에 쓰기에는 경박하기만 한 기교나 일그러짐 따위들을 일일이 찾아 제해주시고 진리를 곧바르게 기술하는 방법을 그 정신과 실천의 삶을 통해 깨우쳐주신 OOO 박사님께 깊은 감사드리고, 많이 늦었지만 그분의 제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됨을 큰 은혜와 영광으로 생각하며, 저를 전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끝없는 인내로 여러 차례를 세상 입 속에서 꺼내주신 OOO 박사님과 OOO 사모님께도 형언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 일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사역자로 불러주신 OOO 목사님과 OOO 사모님에 대한 감사 또한 표현할 길 없으며, OOOO교회 성도들과 동역자들에게도 큰 빚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문 이전에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일깨워주시려 애써주시는 OOO 박사님 외에도 그리스도인의 참 명철과 지성이란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OOO, OOO 두 분 박사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OOO 박사님은 이 졸고를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결론부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알려주셨습니다.끝으로, 텅 빈 상태로 온 저에게 네 학기 동안 아낌없이 부어주신 OOO 박사님께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는 그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남은 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의 경우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존재로 심지어는 피차에 별로 떠 올리고 싶지 않은 존재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남은 자(the remnant)가 아니며 그들도 나의 남은 자가 아님은 물론 피차 잃어버린 자(the lost)인 셈이다.


남은 자 사상은 국가의 존망이나 우주적 종말에만이 아니라 이같이 불과 수년전 <감사의 글>에 적용됨이 더 마땅하다. 아니, 그 <감사의 글>은 이미 우주적 종말의 현장인 것이다. 십자가 현장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감사의 글>을 덮어두고서는 엉뚱한 현장에 나가 종말을 맞으려 애쓴다. 텍스트(logos) 보다 실천(praxis)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먼지가 쌓이는 원리는 이처럼 <감사의 글>에 먼지가 쌓이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이란 알파, 베타, 감마-가 아니라 이와 같은 먼지 덮인 해묵은 <감사의 글>이다.


이 세상 모든 관계 속에서 ‘남은 자’가 되라는 말로써 ‘되도 않는’ 화해를 두고 속을 끓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너는 안돼!’ ‘그 종자들은 안돼!’ ‘아니야!’라는 식으로 <감사의 글>을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그것을 열어두어야 한다. 렘넌트는 그루터기로만 사용해야지 원수가 만나는 외나무다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 바알 신전에 가서 무릎 꿇을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감사의 글>을, <성경>을 덮어두는 이들은 많다. 그 텍스트를 덮어둠으로 무릎 꿇는 것이며, 텍스트를 열어둠으로 ‘남은 자’가 될 것이다-



에필로그 | 남은 자 인플레이션


아모스 선지자는 그 남은 자 인플레이션을 이렇게 조롱하였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암 3:12)


우리는 무서운 사자 입 앞에 부들부들 떠는 양이 아니라 다 먹히고 남겨진 뼈와 살점들, 곧 비단 방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2014.1.5일자 | 남겨진 자(the remnant), 사라진 자(the lost). | 렘 31:7-14, (cf. 시 147:12-20; 엡 1:3-14; 요 1:(1-9), 10-18.)


이미지 참조:

http://www.yadvashem.org/yv/en/exhibitions/bearing_witness/surviving_remnant_shafri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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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4. 1. 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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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8세 때에 어머니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덕택에 전도서에서 가르치는 14쌍의 때(time) 가운데 가장 첫 번째인 (1) 날 때, 죽을 때를 일찍부터 알아, 이렇게 그 14쌍의 때를 설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쌍인 (2)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는 아마도 내가 성실하게 섬겼던 교회에서 뽑힐 때였을 것이다. 단순히 뽑히는 게 아닌 ‘심었다가 뽑히는’ 것을 말한다.


(3) 죽일 때와 치료시킬 때. 여기서 죽일 때(to kill)는 앞의 죽을 때(to die)와는 또 다른 것이다. 게다가 누가 죽이는 것인지 주어가 없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때의 쌍이 그러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순히 죽기만 하는 게(to die) 아니라 누군가가 ‘죽이는’ 느낌이 있기에(to kill) 누군가가 ‘치료시킨다-’라는 느낌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4) 헐 때와 세울 때. 나의 어떠어떠한 고대하던 것들은 헐렸지만 이 작은 미문(美門)은 세워졌다.


(5) 울 때와 웃을 때, 그리고 (6) 슬퍼할 때와 춤출 때. 이 들쭉날쭉한 4개의 느낌을 우리는 조울증이라고 말하지 않고 ‘때’라고 말해야 한다. ‘때’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조울증인 것이다.


(7)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 그 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각자 다르겠지만 그 돌은 어떤 일의 기초일 수도 있고, 그래서 그것은 어떤 서약, 맹약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버려진 약속을 다시 집어들 때가 있는 것이다.

 

(8) 안을 때(받아들일 때)와 안은 것을 멀리할 때. 나는 왜 저 사람과 멀어졌을까? 우리는 저 놈이 나쁜 놈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때’라고 말한다. 눈치 챘겠지만 이 모든 14쌍의, ‘28때’의 원인은 바로 그 ‘때’ 자신인 것이다.


그 외에 (9) 찾을 때와 잃을 때, (10) 지킬 때와 버릴 때도 있다. 100세에 간신히 아들을 낳았는데 그걸 바치라구? 여기서는 하나님이 ‘어쩌구저쩌구 아니야?’ 라고 추론하지 않고 단지 그 ‘때’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11) 찢을 때와 꿰맬 때. 찢어지면 새로 사면 될 것이지만 ‘꿰매야 할 때’가 있다. 새로 사서 구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꿰맸기 때문에 상처라는 것도 남는 것이다. 이 역시 ‘때’를 지목할 뿐이다.


(12) 잠잠할 때와 말할 때. 나는 가급적이면 남들이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남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노력한다. 매우 고된 것이다.


(13)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대부분의 경우는 사랑했던 그(것)를 미워하며, 미워했던 바로 그(것)를 사랑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이들 모든 굴절에는 ‘때’라는 것이 끼어 있다.


(14)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 이 기록은 아마도 전쟁을 마치고, 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가족과 신앙이 다 몰살당하고, 그러고도 남은(remnant) 모진 생명은 포로기를 살아야 했을 때, 그 포로기마저 다 저물어 갈 무렵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평화에는 힘의 평화가 있고, 다 헛된 후의 평화가 있다. 둘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전자에 비해 후자는 열등한 것인가? 하나님은 힘센 평화에만 거하시고 헛된 평화에는 안계실까? 그렇다면 그 평화는 시간이 해결해준 것인가? 하나님이 해결해주신 평화인가?


그래서 이 전도서의 14쌍의 때는 주어 없이, 하나님이 주어인지 악마가 주어인지 알 수 없이 단지 그 때가 주도를 하고 있다. 


특히 이 14쌍의 때의 시작을 거는 전도서 3장 1절(“하늘 아래 범사에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에서 앞의 때는 크로노스(Chronos)이며 뒤의 때는 카이로스(Kairos)다.


* 알다시피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이면서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이다. 


그렇지만 3장 1절 이후에 펼쳐지는 14쌍의 때 즉 28개의 때는 모두 크로노스일 뿐이다. 왜 카이로스는 없고 크로노스뿐일까?


그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때’는 카이로스인 것처럼 떠들고 다니지만 사실은 크로노스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을 때가 날 때를 집어 삼키며,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심을 때를 집어 삼키며, 치료시킬 때가 죽일 때를 집어 삼키며.., 그리고 세울 때가 헐 때를 집어 삼킬 뿐이다. 


그리하여서는 마침내 그 전쟁을 평화가 집어 삼키는 것이다. 평화가 전쟁을 집어 삼킬 때도 많지만 ‘헛됨’을 이길 수 있는 전쟁이란 이 세상에 없다.



에필로그 | 새로움의 시작 “헛됨”


이 28 때(크로노스)의 결론은 바로 11절 ‘영원’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영원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28 크로노스를 지났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운영의 문제 때문에 이 ‘영원’이라는 비 물질을 물질로 사들일 수 있는 것처럼 흘러간다. 그리고는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카이로스라고 가르친다. 크로노스의 잔인무도함을 알지 못하고 영원이라는 카이로스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카이로스를 나는 배격한다.


우리 미문(美門)의 자매, 형제들은 대부분이 젊기에, 그 젊은이들에게 “새롭고 새롭다” 해도 시원찮은데 2014년을 “헛되고 헛되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헛되다’를 통해서 가장 강력한 ‘새로움’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14쌍의 대 즉 28때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 우리 자신을 올려놓아 볼찌어다-


1. 날 때, 죽을 때.

2. 심을 때, 심은 것을 뽑을 때.

3. 죽일 때, 치료시킬 때.

4. 헐 때, 세울 때.

5. 울 때, 웃을 때.

6. 슬퍼할 때, 춤출 때.

7. 돌을 던져 버릴 때, 돌을 거둘 때.

8. 안을 때(받아들일 때), 안은 것을 멀리할 때.

9. 찾을 때, 잃을 때.

10. 지킬 때, 버릴 때.

11. 찢을 때, 꿰맬 때.

12. 잠잠할 때, 말할 때.

13. 사랑할 때, 미워할 때.

14. 전쟁할 때, 평화할 때.



* 2014.1.1. | 때(a time)가 있다 | 전 3:1-13, (cf. 시 8; 계 21:1-6a; 마 25:31-46.).

* 이미지 참고:


Time warps all things. Melting Watch, 1954, by Salvador Dali -http://ignite.me/articles/consciousness/what-our-memories-say-abou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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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